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검무' 추던 조선 여성, 1930년대 파리와 뉴욕을 휩쓸다

입력 : 2020.03.31 03:09

[무용가 최승희]

유럽·미국 등 돌며 검무·승무 선봬… 직접 썼던 '홍길동 모자' 파리서 유행
뉴욕선 '세계 10대 무용가' 평 얻고 피카소·장 콕토도 팬으로 알려져

1950년대 소련의 사진작가가 필름에 담은 한국의 여성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사진 자료집이 최근 출간됐어요. 책을 낸 배은경 박사는 2017년 모스크바의 문서보관소에서 이 사진들을 발굴했는데, 작가 이오노비치는 스탈린을 비롯한 유명 인물의 전문 촬영가였다고 해요. 다시 말해 최승희는 당대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였다는 얘기죠. '원조 한류(韓流) 스타'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최승희입니다.

'조선 무희 만세!' 파리의 함성

1939년 1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극장 중 하나인 살 플레옐 무대에 강렬한 인상의 동양인 여성이 섰어요. '무척 가늘고 긴 손가락, 아이 같은 입, 사랑스러운 입술'(파리 신문 르 주날의 표현)을 지닌 이 미모의 여성은 빠르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는 '검무', 허공에 긴 소매를 우아하게 휘날리는 '승무'를 췄어요. 불상의 이미지를 몸짓으로 승화한 '보살춤', 어린 신랑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그려낸 '초립동'도 선보였지요.

대단한 반응이었어요. 최승희는 1939년 4월 11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파리 시민들이 '앙코르, 앙코르'를 연호하면서 '조선 무희 만세!'라며 장내가 떠나갈 듯 열광했다"고 회고했죠. 비평가 알베르 모리스는 춤을 추는 최승희의 손에 대해 "곧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두 마리의 흰 새 같다"고 했습니다.

'홍길동 모자'가 파리를 휩쓸다

여러분은 혹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파리에서 홍길동 모자가 유행했다"는 말이 믿어지세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답니다. 최승희 공연이 끝난 뒤 모자 디자이너인 생 시르는 '초립동'에서 최승희가 썼던 초립을 본뜬 모자를 짚으로 만들어 패션쇼에 내보냈습니다. 최승희는 제자 김백봉에게 "파리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뭐야, 내가 공연에서 썼던 모자를 너도나도 쓰고 다녀"라고 했지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김영석

파리 공연은 최승희가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유럽·미국·남미 등 세계를 순회하며 벌였던 공연의 일부였어요. 최승희는 지금도 파리 방문객들이 에펠탑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앞에 모이는 샤요국립극장에서 1939년 6월 15일 두 번째 파리 공연을 했습니다.

2016년 6월 한국 국립현대무용단이 샤요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을 때 필자는 취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때 디디에 데샹 극장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한국 춤이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77년이 걸렸다"며 옛 최승희 포스터를 기자들에게 보여줬던 것이 잊히지 않는군요.

피카소·장 콕토도 매료시킨 춤

강원도 홍천 출신인 최승희는 1926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 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石井漠)로부터 무용을 배웠고, 3년 만에 주역급으로 발탁됐습니다. 1930년 본격적인 무용 공연을 시작해 전국을 순회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한국 전통무용의 현대화에 앞장섰습니다. 1938년 뉴욕 공연 때는 '세계 10대 무용가'란 평을 얻었죠. 화가 파블로 피카소, 소설가 존 스타인벡, 시인 장 콕토 등이 그의 팬이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뒤 일제 지원병 선전 영화 시사회에서 공연하는 등 친일 행적도 남겼습니다. 광복 직후 월북한 뒤 1956~1957년 소련과 동구권 순회공연을 했는데, 최근 발간된 사진 자료집은 바로 이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58년 남편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체포됐고 본인도 1967년 숙청됐다고 합니다. 남한에선 월북 인사라는 이유로 1988년까지 최승희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기도 했습니다.

[최승희 무용 계승한 김백봉… '한국 춤의 대모'라고 불리죠]

최승희의 무용은 제자인 김백봉(93)을 통해 계승됐습니다. 최승희와 나이 차이가 16세인 그는 열네 살 때 최승희 문하에 들어갔는데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오래도록 춤은 가르치지 않고 빨래와 지압 같은 궂은일을 시켜 견뎌내는지 봤다는 것인데, 서구적인 외모로 유명한 최승희가 정작 교육은 전통적인 도제 방식이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이후 김백봉은 경희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부채춤·화관무를 비롯한 한국 신무용의 기틀을 만들어 지금은 '한국 춤의 대모(代母)'라 불립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