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무대 위 남녀의 벽 허물다… 여성도 '햄릿' 역 맡았죠

입력 : 2020.03.27 03:09

[젠더 프리 캐스팅]

배우의 성별과 관계없이 역할 지정,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되어 있던
여성 배우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성별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시도
영국에서 여성 배우가 '리어왕' 연기… 남성 배우가 '햄릿 약혼녀' 역 맡기도

요즘 예정돼 있던 많은 공연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되거나 미뤄지면서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서울 대학로에선 뮤지컬 '데미안'(3월 7일~4월 26일) '미드나잇: 앤틀러스'(2월 11일~5월 3일) 등의 작품에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요.

두 작품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젠더 프리 캐스팅(Gender free casting)'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데미안의 두 주인공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원래 남성이지만, 이번 뮤지컬에선 남녀 배우들이 번갈아 연기하고 있어요. 옛 소련의 비밀경찰이었던 '앤틀러스' 역할도 남성 배우들과 함께 여성 배우들이 캐스팅돼 남성 음역대를 노래하는 것은 물론 액션까지 소화하고 있지요. 젠더 프리 캐스팅이란 무엇이고 어떤 작품에 도입됐을까요?

여성 배우가 '햄릿' '리어왕' 연기

'젠더 프리 캐스팅'이란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것을 뜻해요. 기획 단계부터 배역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구분 지어 놓지 않거나, 성별이 고정된 역할이더라도 이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섭외합니다.

하지만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단순히 배우가 자신과 다른 성별의 배역을 맡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과거엔 여성들이 공연 무대에 오르는 것이 금지돼 있었어요. 연극이 꽃피우던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여성 역할은 남성 배우가 분장하거나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사춘기 소년이 맡는 것이 관례였어요. 이런 것을 '젠더 프리'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2018년 영국 런던 셰익스피어글로브시어터에서 공연된 ‘햄릿’에서 햄릿 역을 맡은 예술감독 미셸 테리(왼쪽)와 햄릿의 친구 허레이쇼 역을 맡은 캐서린 에런이 연기하는 모습. 햄릿과 허레이쇼는 본래 남성이지만, 이 공연에선 모두 여배우가 맡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이뤄졌습니다.
2018년 영국 런던 셰익스피어글로브시어터에서 공연된 ‘햄릿’에서 햄릿 역을 맡은 예술감독 미셸 테리(왼쪽)와 햄릿의 친구 허레이쇼 역을 맡은 캐서린 에런이 연기하는 모습. 햄릿과 허레이쇼는 본래 남성이지만, 이 공연에선 모두 여배우가 맡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이뤄졌습니다. /Tristram Kenton

젠더 프리 캐스팅은 2000년대 전후로 그동안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되어 있던 여성 배우들의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됐습니다. 셰익스피어 연극을 비롯한 고전 작품에서는 주로 남성 배역이 주인공을 비롯해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역할을 맡고, 여성 배역은 남자 주인공의 사랑의 대상이거나 단순한 조력자 등 부차적인 역할에 그칩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을 깨보자는 시도에서 해외에선 현대극뿐 아니라 고전 작품에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2018년 영국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에 올라 화제가 된 '햄릿'이 대표적입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는 셰익스피어 작품 전용 극장이자 그가 경영까지도 관여했던 런던의 유서 깊은 극장을 재건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2017년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여배우 미셸 테리는 자신이 남성인 '햄릿'을 연기하고 약혼녀 '오필리아'는 남성 배우에게 맡기는 과감한 도전으로 큰 호응을 얻었죠. 이에 조금 앞서 2016년 런던 올드빅 시어터에서 80대 여성 배우 글렌다 잭슨이 '리어왕' 역할을 맡기도 했어요. 그녀는 지난해 같은 공연으로 미국에 진출해 브로드웨이 최초의 여성 리어왕이 됐습니다.

블라인드 캐스팅도 등장

젠더 프리 캐스팅은 여성 배우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준다는 점 외에도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기존 틀에 갇히지 않은 새로움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젠더 프리 캐스팅은 특히 호응이 높습니다. 해당 배역은 성별에 자유로워지면서 남녀 문제가 아닌 좀 더 다양한 문제를 다룰 수 있어요. 배우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성별을 연기하면서 더 다양한 연기 폭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똑같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도입하면 완전히 새로운 공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최근엔 성별뿐 아니라 인종, 장애 등을 따지지 않고 배역을 맡는 '블라인드 캐스팅(Blind casting)'이란 개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의 예술감독 미셸 테리는 2018년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는 여성 주인공 로절린드 역에 남성 배우 잭 리스키를, 또 다른 주인공 실리아 역에는 청각 장애인 여성 배우인 나디아 나다라자를 캐스팅해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공연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편견에서 벗어날수록 앞으로 더 새롭고 다양한 공연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국내 첫 젠더 프리 캐스팅… 2001년 연극 '에쿠우스']

우리나라 최초의 젠더 프리 캐스팅은 2001년 연극 '에쿠우스'에서 이뤄졌습니다. 한국 연극계의 대모 박정자 배우가 남성 정신과 의사인 다이사트 박사로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 '여성 다이사트'로 젠더 프리 캐스팅의 시작을 알렸죠. 뮤지컬로는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왕을 여성 배우인 김영주가 맡은 것이 첫 사례예요. 창극에서도 이런 시도를 볼 수 있는데 '트로이의 여인들'(2016)의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 그리고 '패왕별희'(2019)의 우희 역을 남성 소리꾼 김준수가 맡아 호평을 받았습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