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소녀의 기도'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피아니스트 첫걸음이죠

입력 : 2020.03.21 03:00

[피아노 명곡집]
폴란드 여성 작곡가의 '소녀의 기도'
자유롭게 짜여진 변주곡 형식으로 도입부의 특색있는 전개 돋보여

흥겨운 곡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말이 발을 공중에 띄운다는 의미의 4분의 2박자 갤럽 리듬으로 구성

평범하게 지나가는 일상의 소중함이,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집에서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에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네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조금 배웠던 분이라면 옛 기억을 되살려 쉬운 피아노곡 하나 정도 쳐보면 어떨까요? 피아노 학원 등에서 하농, 체르니와 함께 대부분 학생이 갖고 다니던 악보책이 바로 '피아노 명곡집'이에요. 피아노 명곡집은 1970년대 후반 국내에 피아노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한 출판사에 의해 처음 제작됐는데, 초보자들이 쉽게 칠 수 있는 곡들을 모아놓아 곧 피아노 교본으로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이 곡집에 들어 있는 곡들은 지금도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필수 코스입니다.

아름다운 변주곡 '소녀의 기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손을 벌려 옥타브(피아노 건반으로 8도 간격)가 닿기 시작하면, 거의 모든 학생이 치고 싶어 하는 곡이 있죠. 여성 작곡가 테클라 봉다르제프스카(1829~1861)가 작곡한 '소녀의 기도'(1856)입니다. 앞부분이 멋진 옥타브로 시작하고, 이어 등장하는 주제 역시 옥타브 음형으로 도약하기 때문에 손이 작은 사람은 연습을 많이 해야 하지만,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 도전하는 사람이 많죠. 이 곡의 작곡가 봉다르제프스카는 폴란드 출신으로 피아노곡 약 35개를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에 죽음을 맞아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어요. '소녀의 기도'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녀의 기도' 악보의 원본 표지(왼쪽). 오른쪽은 영국 화가 존 프레더릭 헤링이 그린 우편마차입니다.
'소녀의 기도'와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는 국내에서 초급자용 피아노 교본으로 널리 쓰이는‘피아노 명곡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주법이 비교적 단순하지만, 각각 선율이 아름답고 리듬이 재미있어 어린 학생들이 좋아합니다. 사진은 '소녀의 기도' 악보의 원본 표지(왼쪽). 오른쪽은 영국 화가 존 프레더릭 헤링이 그린 우편마차입니다. /위키피디아
'소녀의 기도'는 자유롭게 구성된 변주곡 형식인데, 이 곡과 비슷한 변주 형태를 지닌 명곡이 또 있습니다. 바로 애디슨 와이먼(1832~1872) 작곡의 '은파'죠. 영어로 'Silvery Wave', 즉 은빛 파도를 의미하는 작품의 제목은 부드러운 멜로디와 화려한 변주로 이루어진 작품의 악상과 잘 어울립니다. 눈부신 파도가 눈앞에 쏟아져 내리듯 화려한 옥타브 진행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주제가 먼저 나오고 5개의 변주가 이어지며 점차 화려함과 흥겨움을 더하는 모습으로 꾸며집니다. 작곡가 와이먼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태생으로 뉴햄프셔에서 음악 학교를 설립해 교육자로 활동했었죠.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나 생전에 '은파'를 포함해 아름다운 피아노 소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흥겨운 리듬의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이번에는 듣는 순간 어깨를 들썩이게 되는 갤럽(Gallop) 리듬이 인상적인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를 소개합니다. 갤럽은 4분의 2 박자로 된 경쾌한 춤인데요, 승마에서는 말이 네 발을 모두 공중에 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작곡가 헤르만 네케(1850~1912)가 만든 이 곡의 원래 제목은 헝가리어인데, 앞에 등장하는 '크시코스(Csikós)'는 헝가리어로 '말'이나 '카우보이'를 뜻해요. 독일인인 네케가 작품 이름을 헝가리어로 붙인 이유는 중간에 헝가리 민속음악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빌려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나온 세 곡이 연주하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스웨덴 출신의 요한 에마누엘 요나손(1886~1956) 작곡의 '뻐꾸기 왈츠'를 추천합니다. 스톡홀름 출신의 요나손은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고 스톡홀름의 극장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늦은 봄 정겹게 우는 뻐꾸기 소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뻐꾸기 왈츠'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오르간, 아코디언, 신시사이저 연주까지 거의 모든 악기로 편곡되었죠. '뻐꾸기 왈츠'는 피아노 초보가 연주해도 무리 없을 쉬운 곡입니다.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지만 자신의 능력대로 속도를 설정해 연주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죠.

전투를 생생하게 그린 '워털루 전쟁'

어렵지 않은 피아노 기교로 치열한 전투 모습을 그린 흥미로운 작품도 있어요. 영국의 여성 작곡가 길먼 앤더슨이 1860년대에 만들어 웰링턴 공작에게 헌정한 '워털루 전쟁'은 5분 남짓이지만 전투 장면을 음악을 통해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죠. 전장으로 향하는 행군, 대포 소리, 치열한 전투 속에서 나타나는 전진과 후퇴, 승리의 노래와 춤, 마지막으로 패자를 위로하는 엄숙한 노래까지 짧은 시간 속에 모두 표현한 놀라운 작품이죠. 워털루 전쟁은 1815년 6월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대영제국-프로이센군 연합이 맞붙어 프랑스가 패한 유명한 전투입니다. 앤더슨이 만든 피아노 악보에는 부분마다 전투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내용이 설명돼 있어 더욱 실감 나게 연주할 수 있습니다.

명곡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지금도 꾸준히 학생들의 손으로 연주되며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작은 걸작들이죠. 완벽하진 않더라도 악보를 보며 건반을 누르는 순간 곧바로 명곡들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양손 검지로 치는 젓가락 행진곡… 숙련자 반주에 맞춰 연주해요]

피아노 명곡집에는 없지만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곡이 있죠. 바로 '젓가락 행진곡'입니다. 양손의 검지손가락들을 마치 젓가락처럼 이용해 건반을 누르면서 소리를 만들어내면 됩니다. 이 곡의 작곡가는 영국 출신의 여성인 유피미아 앨런(1861~1949)입니다. '젓가락 행진곡'은 그녀가 불과 열여섯 살 때 만든 매력적인 피아노 소품입니다. 앨런은 본명 대신 '아르튀르 드 륄리'라는 가명을 사용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 곡은 혼자 연주하는 악보도 있지만 피아노 연탄(한 대의 피아노를 두 사람이 함께 치는 곡)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죠. 앞서 언급한 '젓가락' 부분은 학생이 연주하고, 보다 어려운 저음의 반주 부분은 선생님이나 더 능숙한 연주자가 맡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