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티베트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나라, 763년엔 장안도 점령

입력 : 2020.03.18 03:00

[토번 왕국]
티베트 부족들 6세기 토번 왕국 수립… 왕권·군사력 강화한 송짼감뽀 국왕
청혼 거절 빌미로 당과 싸워서 승리… 당 태종의 공주 다섯째 왕비로 맞아
670년엔 기마군단이 10만 당군 격파

지난 10일은 중국 정부의 티베트 강점에 항의해 티베트인들이 항쟁을 벌인 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50년 중국 공산당 정부는 군인 수천명을 티베트로 파병해 점령하였고, 티베트인들은 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어요. 하지만 중국이 병력을 대거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속해 있는 티베트이지만, 그곳에 한때는 중국을 위협했던 토번 왕국이 존재하기도 했어요. 과연 토번은 어떠한 나라였을까요?

티베트 고원의 최강국으로 발전한 토번

토번 왕국 이전 티베트인들은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다양한 부족이 전쟁을 통해 통합되면서 점차 큰 규모의 국가가 만들어졌어요. 그리하여 6세기 즈음에는 서부 티베트 지역의 샹슝, 야루짱부강(江) 북쪽의 숨파와 남쪽의 야루라는 세 큰 나라가 존재하게 됐습니다. 그중 야루는 농업과 수공업, 교역의 발달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근 지역을 병합하면서 인구 20만의 토번 왕국으로 발전했어요.

토번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33대 짼뽀 송짼감뽀(가운데)의 불상.
토번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33대 짼뽀 송짼감뽀(가운데)의 불상. 왼쪽은 그의 넷째 왕비인 브리쿠티 데비이며, 오른쪽은 다섯째 왕비인 문성공주입니다. 송짼감뽀는 당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것을 빌미로 당군과 결전을 벌여 승리했어요. 그 결과 송짼감뽀의 아내가 된 문성공주는 당의 선진 문물과 불교 문화를 토번국에 전했습니다. /위키피디아
6세기 후반 31대 짼뽀(티베트어로 '국왕'을 의미)인 닥리넨세 때 토번은 급격히 성장했어요. 이 시기에 이르면 숯을 이용해 금속을 단련할 수 있게 됐고 농업기술도 크게 발전해 나무 쟁기와 가축을 이용한 경작이 가능해졌어요. 이러한 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토번은 주변 열두 왕국을 정복했죠. 토번의 확장은 32대 짼뽀 남리뢴짼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어요. 600년경 이웃 국가인 숨파를 손에 넣으면서 인구가 늘어나 군사력이 막강해졌고 토번은 티베트 고원의 최대 강국이 됐습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를 하려는 남리뢴짼의 노력은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629년경 남리뢴짼은 귀족 세력에 의해 암살됐습니다.

최전성기엔 당의 수도도 일시 점령

남리뢴짼에 이어 짼뽀에 즉위한 것은 토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33대 짼뽀 송짼감뽀였어요. 그는 선대에 이루지 못했던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들을 하나씩 해나갔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그의 개혁 중 하나는 군사제도 개편이었어요. 전군을 군단으로 나누고 전국을 군사 단위로 세분화하며, 평민은 생업에 종사하는 농민과 유목민인 동시에 군인이 됐어요.

700년경 토번 지도
이 군사력은 특히 당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빛을 발했어요. 송짼감뽀는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당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들까지 영향력을 넓히고자 했어요. 당에 외교사절을 보내 당 태종에게 당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하였죠. 하지만 송짼감뽀의 요구는 거절당하였고 이는 송짼감뽀가 당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주었어요. 그는 638년 북부 티베트로 진격하여 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토욕혼이라는 독립국가를 굴복시켰어요. 토욕혼의 왕이 당으로 피신하자 자연스럽게 토번군과 당군의 결전이 시작됐는데, 당군은 토번의 강력한 기마 군단을 당해낼 수 없었어요. 결국 당 태종은 송짼감뽀에게 굴복하여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티베트에 당의 선진 문물과 불교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어요. 670년에는 장군 설인귀가 이끄는 10만 당군이 까르 치링짼뽀 장군이 이끄는 40만 토번군에게 크게 패했고, 763년에는 토번군이 당의 수도였던 장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강화로 인한 혼란으로 멸망

이렇게 당을 위협했던 토번은 송짼감뽀 사후, 위기를 겪고 쇠퇴하게 됩니다. 지금은 '티베트' 하면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불교가 티베트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당시 토번에선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어요. 토착 신앙인 뵌뽀가 매우 강했고 이를 기반으로 했던 귀족들은 불교가 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여러 짼뽀는 불교에 힘을 실어줬고, 38대 짼뽀 치송데짼 때부터 티베트는 불교 국가로 거듭났어요. 지금도 존재하는 삼예사원은 티베트 최초의 절로 바로 이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41대 짼뽀 렐빠짼이 23년 동안 재위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국력을 낭비했고, 특히 '7호양승제(일곱 가구가 승려 한 사람을 먹여 살리는 제도)'를 실시하면서 불교가 많은 비난을 받게 돼 결국 신하들이 왕을 살해하죠. 42대 짼뽀 랑다르마 때는 불교 탄압으로 이어져 842년에는 많은 승려가 죽거나 환속을 강요당하였고, 불경들이 불태워졌어요. 이 혼란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승려 라룽 베끼도제는 임금을 암살했고, 200여 년간 찬란하게 빛나던 토번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