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캉캉춤을 그린 남자… 별명은 '물랭루주의 작은 거인'

입력 : 2020.03.14 03:03

['툴루즈 로트레크'展]

장애로 걸음 불편했던 로트레크, '물랭루주' 댄스홀 포스터로 화제
인물의 순간 표정과 동작 포착해 단순한 선으로 생동감있게 표현
자유롭게 달리고픈 화가 마음처럼 작품 속 인물들 모두 숨차게 뛰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마르트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의 이름이에요. 19세기 말 그 주변에는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작은 사진)라는, 다른 사람에 비해 외모가 좀 독특한 사람이 끼어 있었어요.

로트레크는 프랑스에서 손꼽힐 만큼 이름 있고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하지만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던 그는 열 살 무렵부터 연이은 골절로 고생했고 곧 성장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그는 집 안에서 홀로 그림만 그렸어요. 스무 살이 된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몽마르트르로 향합니다. 7년 후 그는 감각적인 광고 포스터를 그려 그 분야의 최고가 되지요. 오는 5월 3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로트레크의 스케치와 포스터 150여 점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이는 '물랭루주의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레크' 전시를 합니다.

작품 1은 로트레크가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번화가에 있던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라는 댄스홀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그린 포스터예요. 물랭루즈의 무대를 그린 것인데, 저 멀리 안쪽에 서 있는 관객들을 검은 그림자로 표현한 것이 특이해요. 가운데에는 조명을 받은 여자 무용수가 관객 쪽을 향해 나가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쪽으로는 옆모습의 남자 파트너가 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그림은 전체적으로 노랗게 환해서 어디 붙여놓아도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작품1 -〈물랭루주, 라 굴뤼〉, 1891, 컬러 석판화, 176 x 108cm.
작품1 -〈물랭루주, 라 굴뤼〉, 1891, 컬러 석판화, 176 x 108c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위키백과
이 그림은 엄청 커다랗게 그려서 건물 앞에도 세워놓고, 판화로 3000장 넘게 찍어서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리에도 붙여놓았습니다. 1891년 여름에 이 포스터가 파리 시내 곳곳에 나붙자 행인들은 포스터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서로 뜯어가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해요. 당시 27세였던 로트레크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포스터를 그리면 무슨 공연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어요.

로트레크는 이 세상에 단 한 점밖에 없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거리에 여기저기 붙어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그림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대중을 위한 판화와 포스터는 미술관에 걸리는 점잖고 차분한 그림들에 비해 주제도 흥미롭고 구도나 색감도 혁신적이었어요. 대충 그린 것 같거나 못 그린 듯 보여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어당기고 강렬하고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훨씬 중요했거든요.
작품2 -〈에글랑틴 무용단〉, 1896, 컬러 석판화, 61.7 x 80.4cm.
작품2 -〈에글랑틴 무용단〉, 1896, 컬러 석판화, 61.7 x 80.4c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위키백과
작품 2를 보세요. 새로 지은 영국 런던의 한 극장에서 물랭루주에서 공연하는 인기 무용단을 초청했는데요. 로트레크의 명성을 듣고는 그에게 홍보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의뢰한 것입니다. 로트레크는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다리를 번쩍번쩍 차올리는 캉캉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그렸어요. 빠르게 휙휙 그려나간 단순한 선이 특징입니다. 인물들의 눈·코·입과 치마의 물결 같은 주름 장식은 순식간에 그려서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듯 보여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무용수들의 격렬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살아납니다. 로트레크는 자세히 그리기보다 무대 공연의 생생한 기분을 내는 데에 더 집중한 것이지요.

작품 3은 광고 문구를 아직 넣지 않은 포스터용 판화예요. 이 그림 역시 인물들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를 향해 사선 방향으로 한 남자가 달리고 있고, 잔뜩 성이 난 황소가 그 뒤를 쫓고 있네요. 소에게 공격당할까 봐 긴장한 남자의 표정을 보세요. 로트레크는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과 동작을 누구보다 잘 잡아내지요. 아마 요즘 태어났으면 유명한 웹툰 작가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작품3 -〈성난 소〉 1896, 컬러 석판화, 79 x 57.5cm. 작품4 - 〈경마〉, 1899, 컬러 석판화, 51.1 x 35.5cm.
작품3 -〈성난 소〉 1896, 컬러 석판화, 79 x 57.5cm. 작품4 - 〈경마〉, 1899, 컬러 석판화, 51.1 x 35.5c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위키백과

몽마르트르에는 예술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언덕 아래 지역에는 밤늦도록 문을 여는 주점들이 늘어서 있어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드나들었습니다. 로트레크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무용수들과 친구가 되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그는 그런 생활에 만족했지만, 낮과 밤이 뒤바뀐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1899년에 그는 길을 가다 넘어져 크게 다치고 신경쇠약까지 겹쳐 병원에 입원하게 돼요.

작품 4는 병실에서 그린 것이에요. 언젠가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서 멋지게 달려나가는 말과 기수의 뒷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회복된 증거라고 판단하여 퇴원하게 해주었어요. 병원을 나오며 로트레크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세! 나는 내 그림 덕에 자유로워졌어." 이 짧은 한마디 말은 서른일곱을 살다 간 로트레크의 삶 전체를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숨차도록 춤추고 뛰어다녀요.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리고 싶었던 로트레크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합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