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역대 왕 제사 지내는 왕실의 사당… 삼국시대부터 있었대요
[종묘]
'백제 온조왕이 동명왕 사당 세웠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
곡식 주관하던 신 모신 '사직'과 함께 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겨
'종묘사직 보존'이라는 말도 나왔죠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종묘
왕릉이 역대 국왕과 왕비의 주검, 즉 시신을 묻어 놓은 곳이라면 '종묘(宗廟)'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혼을 대신하는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에요. 신위란 나무패나 종이에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 등을 적은 것입니다.
종묘는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어요. 주나라의 예법을 담은 책 '예기'를 보면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를 제사 지낼 수 있다"고 돼 있어요. 즉 천자는 7대 조상까지(7묘제), 그보다 지위가 낮은 제후는 5대 조상까지(5묘제)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종묘 제도의 기본이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등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짐작해요. 하지만 당시 종묘는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시고, 조상 제사와 함께 천지신 제사를 지내는 등 유교적 형태의 종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왕의 지위에 따라 달라진 고려 종묘 제도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는 통일신라 초기에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종묘가 전통적인 시조묘와 신궁과는 별도의 추모 시설로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종묘 제도는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어요. 고려에 들어 최초의 종묘 기록은 고려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 나와요. 성종 16년(997년) 10월에 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요. 성종은 고려의 제6대 왕으로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어요.
- ▲ 그림=김윤지
재미있는 점은 이후 고려 왕의 지위에 따라 7묘제 혹은 5묘제가 결정됐다는 것입니다. 성종은 5묘제를 택했지만 고려 황금기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8대 의종은 천자식 7묘제를 도입했어요. 하지만 원나라 간섭이 본격화된 제25대 충렬왕 때부터는 더는 천자식 예법을 쓸 수 없어 다시 5묘제로 바뀌었지요.
◇조선시대 종묘는 나라 상징하던 공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왕위에 오르면서 궁궐보다 먼저 서두른 공사는 종묘 건설이었어요. 한양 천도가 확정되기 전에는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려고 했어요.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죠. 천도 두 달 뒤인 12월에 한양에 새 종묘를 세우는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어요.
왜 조선은 건국 초부터 종묘를 중요하게 여겼을까요?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 삼았는데 유교는 부모를 잘 섬기는 효(孝)를 도덕의 근본으로 여겼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따라서 최고 통치자이자 백성의 어버이인 왕과 왕비의 영혼을 모시는 종묘는 단순히 왕실의 사당을 넘어 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겨졌어요. 조선은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을 모신 사직(社稷)과 함께 종묘를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라를 달리 이르는 말로 종묘와 사직을 줄인 '종사(宗社)'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왕조를 이어가는 것을 '종묘사직을 보존하다'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했지요.
[조선 종묘에 공민왕 사당이?]
현재 종묘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라는 건물 사이에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을 위해 세운 별당인 공민왕 신당이 있어요.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이 있고요. 조선의 종묘는 조선이 창건될 때 세워졌는데, 이 종묘 안에 고려왕을 모신 사당을 세운 이유는 뭘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왕족을 조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기 위한 것으로 짐작해요. 또는 태조 이성계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영토와 주권을 되찾고,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친 공민왕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세웠을 거라고 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