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지중해 멸치로 만든 젓갈, 로마의 흥망과 함께 했죠

입력 : 2020.03.06 03:09

[가룸(garum)]

소금, 멸치 섞어 3개월간 발효시켜 무상 제공되던 빵에 곁들어 먹어
부자부터 서민까지 두루두루 즐겨…
로마가 멸망한 후 이슬람 왕조가 지중해 차지하며 가룸도 사라졌죠

아지랑이 피는 봄이 오면 우리나라 남해안에 멸치가 찾아옵니다. 멸치는 겨울을 제주도 남쪽 동중국해에서 보내다가 3월쯤 북상하기 시작합니다. 멸치는 봄에 산란을 하는데 이때가 가장 통통하게 살이 올라 맛이 있습니다.

멸치의 이름은 '업신여길 멸(蔑)'자를 쓴 '멸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생선으로 만든 젓갈이 고대 서양사의 중심이던 로마제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음식이었습니다. 작다는 이유로 업신여겨지던 멸치는 어떻게 거대한 제국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부자부터 서민까지 즐겨 먹은 가룸

고대 로마인은 지중해 바다에 풍부했던 멸치로 생선젓을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이 젓갈의 이름은 '가룸(garum)'입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금에 절인 멸치 살을 먹는 '안초비(anchovy)'와는 달랐습니다. 소금에 삭은 살을 걸러낸 동남아시아의 젓갈과 비슷합니다.

당시 로마의 주식은 빵이었습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엔 서민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빵이 제공하는 주된 영양분은 탄수화물입니다. 그래서 근육과 장기를 이루는 단백질 섭취는 쉽지 않았죠. 유럽에서 단백질 공급원인 고기와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것은 19세기 말이나 돼서야 가능했습니다. 지중해 주변은 척박한 석회암 토양이라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이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스페인 바엘로 클라우디아의 옛 로마 유적지에 남아있는 가룸 공장 터. 지중해를 장악했던 그리스와 로마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젓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로마는 멸치로 만든 가룸을 즐겨 먹었는데,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해 빵을 비롯한 다른 음식과 잘 어울렸어요.
스페인 바엘로 클라우디아의 옛 로마 유적지에 남아있는 가룸 공장 터. 지중해를 장악했던 그리스와 로마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젓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로마는 멸치로 만든 가룸을 즐겨 먹었는데,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해 빵을 비롯한 다른 음식과 잘 어울렸어요.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에서 생선젓은 주요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했습니다. 지중해에는 단백질이 풍부한 생선이 많았지만, 쉽게 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인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문명을 만든 고대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즐겨 먹었습니다. 가룸 역시 여기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지요.

가룸은 주로 여름철에 생선과 소금을 섞어 3개월 정도 햇빛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지만 보관은 훨씬 쉬워졌습니다. 게다가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해 로마 시민들은 정부가 무상으로 나눠준 빵을 가룸에 찍어 먹었죠. 가룸이 없었다면 로마인들은 중동이나 이집트 사람들처럼 빵에 겨우 양파를 얹어 맛없게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로마 시민들은 공짜 빵을 얌전히 먹는 대신 반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로마 시민들은 로마제국의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가룸은 계층과 상관없이 두루 사랑받는 음식이었습니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는 '알렉(allec)'이라고 불렸는데, 가룸을 살 돈도 없는 사람은 찌꺼기인 알렉을 사서 먹었습니다. 물론 귀족용 가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치나 고등어로 만든 가룸을 먹었습니다. 고등어 가룸은 로마가 정복한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주로 만들었습니다. 가룸에 올리브유와 허브를 탄 음식은 향수 가격과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로마의 흥망과 함께한 가룸

로마인들이 지중해 서쪽 끝인 스페인과 동쪽 끝인 흑해에서 나는 가룸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지중해가 '로마의 연못'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마케도니아·이집트·시리아 등 지중해 주변의 해상 상업 세력을 차례로 정복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이후엔 어떤 국가도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지중해에 상선을 띄울 수 없었습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던 군국주의 국가인 동시에 해상무역에 힘썼던 상업 국가였습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로마 화폐 데나리온(denarius)은 아시아까지 통용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였습니다. 성경에도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받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로마 화폐는 지금의 미국 달러처럼 상거래의 중심이 되는 기축통화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정치 혼란과 이민족과의 빈번한 전쟁 탓으로 로마의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로마 화폐의 가치는 급속도로 떨어졌고 일부 지역에선 데나리온의 사용을 거부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만들어진 로마 은화의 가치는 2세기에 50%, 3세기 후반에는 5%까지 떨어졌습니다. 화폐 가치 하락에 맞물려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의 곡물 가격은 1세기 초에 견주어 200배 이상 상승했을 정도였습니다. 476년 게르만족의 침공 이전에 로마의 멸망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 멸망 후 지중해는 로마처럼 팽창 전략을 추구했던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661~750)의 앞마당처럼 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지중해가 '로마의 연못' 역할을 못하게 되자 가룸도 사라져 버렸다는 점입니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가룸과 비슷한 액젓으로 남부 중심 도시 나폴리 인근 소도시인 체타라(Cetara)에서 멸치로 만드는 콜라투라 정도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권은중 '음식 경제사'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