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6·25전쟁 낙동강 전선의 핵심지… 국군·시민이 지켰죠

입력 : 2020.03.03 03:00

[대구]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1950년 8월, 북한군이 대구 공격
시민들 남아있고 국군이 싸워 사수

분지지형으로 옛부터 군사적 요충지
통일신라 신문왕이 진골 견제 위해 대구 천도 추진했지만 귀족이 반대

최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대거 나오면서 직격탄을 맞은 대구에 전국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어요. 곳곳에서 기부와 모금이 이뤄지고, 자발적으로 대구에 가는 자원봉사자와 의료진도 많지요. 더불어 대구 지역에 대한 관심도 새삼 높아지고 있어요.

지금의 대구광역시 지역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약 2만년 전부터였다고 해요. 달서구 월성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유적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이후 대구는 한국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종종 등장했죠. 대표적인 세 가지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통일신라의 새 수도 후보

"요즘 들어 몸이 벌벌 떨려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다." 서기 687년, 신라 31대 신문왕은 한 제사에서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어요. 통일신라의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 즉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는 천도(遷都) 계획이 신하들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던 상황이었습니다.

[뉴스 속의 한국사] 6·25전쟁 낙동강 전선의 핵심지… 국군·시민이 지켰죠
/그림=김윤지
앞서 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자 임금과 귀족 사이 갈등이 일어났어요.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아예 토착 세력이 거의 없는 대구로 천도하려고 했습니다.

분지 지형인 대구가 주변 산성을 이용한 군사적 방어가 쉽고 낙동강을 통한 수로 교통과 농업생산력이 우수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으리라고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어요. 하지만 임금 편이었던 귀족들조차 돌아섰기 때문에 대구 천도는 끝내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됩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지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 나랏빚을 갚자!" IMF 사태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애국 모금 운동이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어요.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게 했고, 마침내 대한제국이 13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외채를 짊어지게 됐습니다.

1907년 2월, 대구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고 발의한 뒤 즉석에서 의연금 800원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이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됐지요.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국권 회복을 위한 민중의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닙니다.

나라 사수로 이어진 대구 사수

"인민군 포탄이 대구역 앞에 떨어졌대요!" 6·25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해 전투를 벌이던 1950년 8월 18일, 대구 북쪽 가산산성을 점령한 북한군이 대구 시가지에 박격포를 쐈어요.

만약 대도시이자 낙동강 방어 작전의 중심 도시인 대구를 북한에 빼앗긴다면 적군이 단번에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게 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은 이미 밀양과 울산을 잇는 최후 방어선 '데이비드슨 라인'을 설정해 대구 포기 의사를 드러냈어요.

그런데 포탄이 떨어진 직후 조병옥 내무장관이 지프차를 타고 대구역에 나타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절대 대구를 적에게 넘기지 않겠습니다!" 많은 시민은 그 말을 믿고 대구를 떠나지 않았고, 국군 1사단은 대구 북쪽 다부동에서 북한군 3개 사단과 싸워 승리를 거뒀습니다. '대구 사수(死守)'가 끝내 나라를 지켜낸 셈이었지요. 이 같은 저력을 지닌 만큼, 대구는 어떤 위기가 닥친다고 해도 결국 굳건히 이겨낼 것입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 대구… 옛 이름도 벌판 뜻하는 '달구벌']

대구(大邱)의 옛 이름은 지금도 대구의 별칭으로 쓰이는 '달구벌'입니다. '달'에는 '크다'는 뜻이 있고, '벌'은 평지나 평야, 촌락을 의미한다고 해요. 그래서 달구벌은 '크고 넓은 벌판이나 마을'이란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구는 남쪽의 비슬산과 북쪽의 팔공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입니다.

'대구'의 '구'자는 원래 '언덕 구(丘)'자가 쓰였는데 18세기에 와서 '공자(孔子)의 이름인 구(丘)와 같으니 피해야 한다'는 일각의 지적 때문에 대신 또 다른 '언덕 구(邱)'자를 쓰게 됐다고 합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