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여권으로 세상 읽기]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풍속화… 고흐·고갱에게도 영향 줬어요

입력 : 2020.02.25 03:05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일본에서는 이르면 이달 말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여권이 발급된다고 합니다. 1945년 이래 가장 큰 폭으로 디자인을 바꿨다고 하는데 어떤 모습일지 관심이 모이지요. 일단 지금까지 발표된 정보에 따르면, 새 여권의 속지 그림 중 하나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라는 유명한 우키요에(浮世繪·일본 풍속화)가 될 예정입니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서민층에서 발달한 회화 양식입니다. 채색 목판화가 주를 이루며, 서민의 일상적인 생활상이나 풍경을 다룬 것이 많습니다.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를 들여다보면 도쿄 인근 가나가와 지역을 배경으로 큰 파도가 괴물처럼 달려들고 있어요. 그 아래 놓인 배 세 척은 속수무책으로 요동치고 있어요. 하지만 파도 아래로 멀리 보이는 후지산은 인간 세상의 이러한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이 그림은 이번 여권 외에 4년 후에는 일본 1000엔권의 신권 지폐 뒷면에도 쓰일 예정이지요.
일본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 이르면 이달 말부터 발급되는 새 일본 여권의 속지 그림으로 채택됐습니다.
일본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 이르면 이달 말부터 발급되는 새 일본 여권의 속지 그림으로 채택됐습니다. /위키피디아
이 그림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아흔 평생 3만 장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70대에 그린 서른여섯 장의 후지산 그림이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부악 36경(富嶽36景)'이라는 이름의 이 연작에서 호쿠사이는 부악, 즉 후지산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또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후지산의 모습을 포착합니다.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 외에도 '개풍쾌청 붉은 후지(凱風快晴 赤富士)' '산하백우(山下白雨)' '에도의 니혼바시(江戶日本橋)' 등이 유명한데, 모두 일본 신여권 속지 그림으로 채택됐다고 합니다.

호쿠사이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의 우키요에는 서양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흐나 고갱 등 유명 화가들이 자신들의 화풍에 반영했죠. 프랑스의 한 화가는 호쿠사이의 '부악 36경'에서 영감을 얻어 '에펠탑 36경'을 그리기도 했어요.

역사상 일본은 그림에 묘사된 파도처럼 큰 파도를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쓰나미 같은 자연 세계의 파도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밀려드는 외국 세력의 파도이기도 했어요. 일본이 서양에 문호를 열었던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이 호쿠사이 작품의 배경이 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지역에서 체결되었던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볼거리와 주제가 있는 일본의 새 여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됩니다.



이청훈 '비행하는 세계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