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국 최초 영화 제작자… 1919년 '의리적 구토' 만들었죠

입력 : 2020.02.18 03:00

[박승필]
영화관 '단성사' 운영하던 박승필
재산 1000원 있으면 부자였던 시절 5000원으로 최초의 한국영화 제작
권선징악형 활극으로 흥행 대성공
이후에도 나운규 후원 등 제작·투자

박승필
박승필
최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세계 최고 영향력을 지닌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어요. '기생충'은 한국 영화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제작된 영화여서 더욱 뜻깊습니다. 한국 영화 101년의 꿈이 이뤄진 셈이거든요.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도대체 어디서 무슨 영화가 등장했던 걸까요?

최초의 프로듀서 박승필

한국 영화의 초기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프로듀서'로 불린 박승필(1875~1932·작은 사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영화 제작자와 투자자를 겸한 그는 한국 영화 초창기의 산파 역할을 했죠.

박승필은 본래 공연 제작자였습니다. 1908년 동대문 전차 차고 부지 안에 있던 광무대를 인수해 전통 연희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전문 극장으로 운영했어요. 명창 채란과 옥엽의 판소리, 가야금 합주 등이 큰 인기를 얻은 레퍼토리였다고 합니다.

그는 광무대를 운영하는 동시에 1918년 공연을 주로 하던 종로의 '단성사'를 인수해 영화 전용관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인기 무성영화를 신속하게 수입하기 위해 일본 아미이쿠(天活)사와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유니버설, 프랑스 고몽 영화사의 최신 작품들을 신속하게 단성사에서 상영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당대 최고 인기를 얻고 있던 변사 서양호를 비롯해 모두 6명의 변사를 극장에 상주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때 단성사와 쌍벽을 이루던 서울의 영화관이 역시 종로에 있었던 '우미관'이었습니다. 1910년대 서울에선 이미 수많은 세계 최신 영화가 변사의 해설과 함께 관객에게 선을 보이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한국 영화'는 출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국 영화 밑거름 된 '촬영비 5000원'

그 물꼬를 튼 사람 역시 박승필이었어요. 연극과 영화 전용관을 모두 경영하던 그가 두 장르를 접목하는 실험을 단행했다고 볼 수 있죠. 연극 중간중간 무대 뒤 흰 천에 야외 장면이나 활극을 담은 짧은 영상을 트는 이른바 연쇄극(키노 드라마)으로, 당시 일본 신파극에서 많이 쓰는 방식이었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한국 최초 영화 제작자… 1919년 '의리적 구토' 만들었죠
/그림=김윤지
박승필은 극단 신극좌의 리더 김도산(1891~1921)에게 거금 5000원을 주고 "서울의 명승지들을 찍어 오라"고 했어요. 당시 어지간히 잘사는 부잣집 재산이 1000원 정도 했다고 하니 엄청난 액수였죠.

마침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정의로운 복수)'의 막이 올랐습니다.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복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제목이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라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인이 맡은 촬영과 편집 외에는 우리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된 최초의 한국 영화가 상영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던 것이죠.

흥행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서울의 기생들이 모두 인력거를 타고 단성사로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예요.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에 따르면 권선징악형 활극이었다고 합니다. 김도산이 1921년 늑막염으로 31세에 요절한 이후에도 박승필은 1924년 단성사에 촬영부를 설치해 일본인이 참여하지 않은 첫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만드는 등 영화 제작 시스템을 갖춰나갔습니다.

1926년 대표적 민족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된 곳 역시 단성사였습니다. 이듬해 '나운규 프로덕션'이 설립될 때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맡은 사람도 박승필이었다고 합니다.


[무성영화 해설해주던 '변사'… 심금 울리는 연기로 흥행 좌우]


'변사(辯士)'는 한국 영화 초창기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배우들의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성(無聲)영화에서는 극의 진행과 등장인물의 대사를 따로 설명해 주는 활동사진 해설가, 즉 변사가 필요했습니다.

변사는 남녀 주인공의 대사 연기는 물론, 친절하고 정감 넘치는 해설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영화의 흥행까지 좌우했습니다. 1935년 한국 첫 유성(有聲)영화 '춘향전'이 나오면서 사양길에 접어든 변사는 1949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