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관객이 이야기 속으로… 배우와 대화하고 결말도 바꾸죠

입력 : 2020.02.14 03:09

[이머시브(immersive) 공연]

2000년대 미국·영국서 유행 시작,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공연
국내서 공연 중인 '위대한 개츠비' 배우와 춤추고 대화하며 공연 참여
뉴욕에서 공연하는 '슬립 노 모어' 100개 객실 돌며 원하는 장면 관람

우리나라 신조어인 '관크'라는 말을 아시나요? '관객 크리티컬'을 줄인 말로, '다른 관객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크리티컬은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걸 뜻합니다. 관크는 공연 중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거나, 옆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등 관람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들이 해당하죠. 주요 장면에서 기침 소리를 내거나 몸을 뒤척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눈총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 같은 상식을 깨는 공연이 국내에 여럿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울 중구 그래뱅뮤지엄에서 오는 28일까지 공연하는 '위대한 개츠비'는 관객 참여형 공연을 표방합니다. 관객들은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 '개츠비 맨션'의 손님이 돼 무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장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해외에선 '이머시브(immersive·에워싸는 듯한) 공연'으로 불리는 이런 연극은 관객이 쥐 죽은 듯 가만히 앉아서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펼쳐지는 공연 중 원하는 것만 골라 보는 등 능동적으로 극에 참여할 수 있어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

이머시브 공연은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영국 등에서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기존 공연장의 틀을 깨고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을 좀 더 무대에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죠. 그러다 2003년 영국 극단 '펀치 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라는 작품이 연극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머시브 공연이라는 장르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 '현기증'을 결합한 무언극(無言劇)으로, 5층짜리 건물 한 채를 공연장으로 활용합니다. 배우들은 100여개의 객실에서 일정한 동선에 따라 연기를 펼치고, 관객들은 각 객실을 돌며 공연을 관람합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만 선택해 보거나 특정 배우를 따라다닐 수 있죠. 이 작품은 2003년 영국에서 초연됐을 땐 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2011년 미국 뉴욕에서 공연된 이후 '뉴욕 관광 필수 코스'로 불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어 현재까지 장기 공연되고 있습니다.

서울 중구 그래뱅뮤지엄에서 공연 중인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대 중앙 남녀 배우의 연기를 관객들이 관람하고 있습니다. 이머시브 공연(관객 참여형 공연)에 속하는 이 작품은 관객들이 마치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인 것처럼 공연장을 이곳저곳 돌면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서울 중구 그래뱅뮤지엄에서 공연 중인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대 중앙 남녀 배우의 연기를 관객들이 관람하고 있습니다. 이머시브 공연(관객 참여형 공연)에 속하는 이 작품은 관객들이 마치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인 것처럼 공연장을 이곳저곳 돌면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는 비슷한 형식을 갖춘 이머시브 공연이 속속 등장했죠. 이머시브 전문 극단 '서드 레일 프로젝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덴 쉬 펠(Then She Fell)', 70년대 해변 리조트를 배경으로 한 '그랜드 파라다이스(The Grand Paradise)' 등을 제작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에서도 2012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호주 극단 '원 스텝 앳 어 타임 라이크 디스'의 '거리에서'를 선보인 이래 해외에서 제작한 이머시브 공연을 들여오거나 직접 창작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드는 매력

이머시브 공연은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을 즐기고 싶어 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습니다. 같은 공연이라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관객은 마치 게임을 하듯 흥미진진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공연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완성도가 낮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함께 관람하는 다른 관객들의 태도에 따라 공연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머시브 공연이 갖는 의미는 가볍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하나만 있어도 즐길 거리가 넘쳐나 온종일 혼자 놀 수 있는 시대에 시간을 들여 공연장에 가고, 다양한 선택을 해가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경험은 결코 흔하지 않으니까요. 예술의 역할이 관객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라면, 이머시브 공연은 기술 발달에 맞서 이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 볼 수 있습니다.

['쉬어 매드니스' '나만 빼고'… 공연 중인 국내 이머시브 연극]

국내 이머시브 공연에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 많습니다. 서울 대학로에서 2015년부터 공연 중인 연극 '쉬어 매드니스'는 피아니스트를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관객들이 목격자나 배심원이 되어 용의자 심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범인은 관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범인에 따라 결말도 달라지죠.

지난해 9월부터 공연 중인 연극 '나만 빼고'는 휴대전화 메신저를 통해 관객이 극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줄거리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이 등장인물에게 조언하는 메신저 내용이 무대 위 스크린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됩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