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아내가 시 쓰면 체면 깎여"… 남편 요구에 붓 놓은 이옥봉

입력 : 2020.02.11 03:09

[절필]

글재주로 유명했던 조선 중기 시인, 좋아하는 남자의 소실 되며 절필 약속
이웃이 누명쓰자 결백 주장하는 글 써… 친정으로 쫓겨나 글 쓰며 여생 보내
동시대에 '홍길동전' 쓴 문인 허균, 40세에 '헛된 마음고생'이라며 절필

최근 소설가 윤이형(44)씨가 더는 작품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어요. 그는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는데, 작가의 수상작 저작권을 출판사에 3년간 넘기는 것을 두고 불공정 논란이 일자 글쓰기 중단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을 하는 문인이 어떤 동기로 다시는 붓을 잡지 않는 것을 절필(絶筆)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절필했던 이름난 문인들이 있었어요.

사랑을 위해 절필한 여류 시인 이옥봉

조선 중기 여류 시인 이옥봉(李玉峯·?~1592)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지낸 이봉의 서녀, 즉 소실(小室·첩)에게서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특히 시를 잘 지었다고 합니다. 점차 장안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뛰어난 시를 읊어 유명 인사가 됐죠.

옥봉은 성년이 되자 명문가 자제이자 진사 시험에 장원급제한 조원이란 인물을 사모해 스스로 소실이 되기를 청했습니다. 조원은 대신 앞으로는 함부로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어요. 아내가 시를 짓는 것은 남편 체면을 깎아내린다는 이유였죠. 옥봉은 결국 사랑을 위해 절필을 약속합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김윤지

10여년 후, 이웃집 여인이 옥봉을 찾아옵니다. 자기 남편이 칠석(음력 7월 7일)날 억울하게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에게 부탁해 자기 남편의 억울함을 밝히는 글을 써달라고 했어요. 남편을 귀찮게 할 수 없었던 옥봉은 직접 시를 써서 이웃집 여인에게 건넵니다. '세숫대야를 거울로 삼고 / 물로 기름을 삼아 머리를 빗어도 /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라는 이 시는, 칠석날 설화의 주인공인 견우와 직녀에 빗대 아내가 직녀가 아니듯 남편도 견우가 아닌데 어찌 소를 끌고 갔겠느냐는 재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시를 받아든 형조의 당상관은 뛰어난 글솜씨에 감탄해 사내를 풀어줍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게 된 조원은 옥봉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친정으로 쫓아냈어요. 그 뒤로 옥봉은 조원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친구 죽음으로 붓 놓은 허균

이옥봉과 함께 조선 중기 최고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허난설헌의 동생이자 '홍길동전'을 쓴 문인 허균(許筠·1569~1618)도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동인의 당수였던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훌륭했다고 해요.

허균은 조선 시대 사회 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외에도 '한년참기' '한정록'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시와 산문을 모은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문집완용한음운(文集完用閑吟韻)'이란 시를 남겨요. '마흔세 해 되도록 힘들여 글을 짓고 쓰니 / 헛된 마음고생에 천금을 다 털어 부었다 / 시와 문장 열 권을 쓰기 마쳤으니 / 나, 이제부터 다시는 시를 짓지 않으리라'라는 내용입니다. 훗날 절필시로 불린 이 시를 쓴 이후 허균은 실제로 거의 시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허균이 절필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친구였던 권필(1569~1612)의 죽음입니다. 1611년 임숙영이란 문인이 전시(殿試·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왕실을 비판한 글을 지었다가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됩니다. 권필은 이를 풍자해 '궁류시'라는 시를 짓고, 결국 옥에 갇혔다가 병들어 죽게 되죠. 시 때문에 둘도 없는 친구가 죽음을 당했으니, 더는 시를 쓰기 어려울 정도로 서글프고 허무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조선시대 문인이자 화가 강세황, 영조 한마디에 그림 그리기 멈춰]

조선시대엔 특별한 이유로 붓을 꺾은 화가도 있었습니다. 조선 영조·정조 때의 문인이자 화가로 이름을 떨친 강세황(1713~1791)은 51세부터 10여년간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은 영조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수 있다”고 당부한 것을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보다는 문인으로 이름을 알리길 바란 것이었죠. 이후 강세황은 영조의 배려로 늦은 나이인 61세에 벼슬길에 올라 현재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판윤까지 지냈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