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전쟁보다 무서웠던 흑사병·천연두, 후추 무역 때문에 전파

입력 : 2020.02.07 03:09

[후추와 전염병]

유럽 인구 3분의 1 목숨 뺏은 흑사병
14세기 무렵 후추 무역 경로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유럽 전역에 퍼져
16세기, 후추 원산지인 인도 가던 콜럼버스 등 유럽인들 신대륙 발견
천연두 퍼뜨려 원주민 95% 사망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추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2003년 중국과 아시아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전염병은 때로 전쟁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끔찍한 재앙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흑사병)와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퍼졌던 천연두입니다.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천연두는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인 인디오들의 95%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신대륙과 구대륙에 이런 전염병들이 퍼진 것은 공교롭게도 한 향신료 탓이었습니다. 바로 후추입니다. 후추는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이었던 페스트를 유럽으로, 구대륙의 천연두를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퍼트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후추는 어떻게 전염병의 매개체가 된 것일까요?

후추 무역 경로 따라 유럽에 퍼진 페스트

14세기 무렵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으로 처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제노바·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거쳐 북유럽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위치에 있던 동로마제국과 무역을 중시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거래 품목은 후추, 계피 등 동양의 향신료였습니다. 향신료는 육식 중심인 유럽인의 식탁에서 꼭 필요했거든요. 이 중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후추였습니다. 후추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검은 금'으로 불릴 정도로 고가에 거래됐습니다. 후추 무역은 지리적으로 동로마제국과 가깝고 해군력이 발달한 베네치아·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장악해 왔습니다.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소장된 질 르 뮈지(1272~1352)의 ‘1349년 투르네의 흑사병’.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흑사병)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서 한꺼번에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묘사돼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이었던 페스트는 후추 무역로를 따라 동로마제국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어요.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소장된 질 르 뮈지(1272~1352)의 ‘1349년 투르네의 흑사병’.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흑사병)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서 한꺼번에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묘사돼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이었던 페스트는 후추 무역로를 따라 동로마제국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특히 제노바는 동로마제국 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204년 4차 십자군전쟁에서 십자군이 동로마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제노바는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으로 물러나 니케아를 수도로 삼은 동로마제국 망명정부를 지원했습니다. 대신 동로마제국은 제노바가 흑해와 에게해에서 후추 등을 독점 무역하도록 했죠. 제노바령이었던 흑해 연안 항구도시 카파에서부터 유럽으로 페스트가 가장 먼저 퍼졌다는 설이 나오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후추 무역 경로를 따라 페스트가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얘기죠.

'후추의 고향' 찾다 신대륙에 천연두 전파

하지만 1453년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제국인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에 가장 열심이던 제노바 상인들은 예전과 같은 수익을 위해서는 오스만제국을 우회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도 그런 제노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유럽을 돌며 신항로 개척을 위한 투자자를 모집하던 콜럼버스는 마침내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죠. 1492년 그는 후추의 고향인 인도를 찾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찾은 것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곧바로 신대륙 정복에 나섭니다. 스페인의 주 무기는 총과 대포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군인 한 명, 한 명은 끔찍한 생물학 병기였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 천연두를 퍼뜨렸습니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인간이 소를 키우면서 전염된 것입니다. 아메리카 선주민들은 소 같은 대형 동물을 사육하지 않아서 구대륙 사람들처럼 천연두 항체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홍역 같은 전염병도 퍼졌습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창궐했느냐면 "인디오들은 스페인 군인만 쳐다봐도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전염병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두 전염병은 세상을 크게 바꿨습니다. 페스트로 인구가 급감한 유럽에서는 인건비가 급등했습니다.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가서 임금노동자가 됩니다. 자급자족인 장원에 의존하던 중세 봉건제는 임금노동과 화폐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연두로 아메리카 선주민이 대부분 사망하자 스페인 등 유럽 제국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해 노예로 끌고 와 설탕·목화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노예무역은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자본 축적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자본은 18세기 산업혁명의 밑천이 됩니다. 경제사에서 자본주의의 시작을 15세기 대항해시대로 보는 이유입니다. 자본주의 시작, 그 순간에는 전염병이 있었고 그 전염병 뒤에는 매콤하고 쌉싸름한 후추가 있었던 것입니다.


권은중·'음식 경제사'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