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부여 등 한국 고대사 담은 中 역사책, 오류·편견도 섞여있죠
입력 : 2020.02.04 03:00
| 수정 : 2020.02.04 13:13
[삼국지 위서 동이전]
1700여년 전 부여·고구려·삼한 등 풍습·생활상 기록한 중국 역사서
부여의 행사를 '음식가무'라고 표현… 유독 흥과 끼 많은 옛 조상들 모습
타국의 기록인만큼 외국인의 편견·연대·날짜 등 오류 감안하고 봐야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 오류가 많다는 주장이 최근 국내에서 나왔어요. 최진열 한국전통문화대 연구교수는 "'삼국지' 중 오서(吳書)를 분석한 결과 연대와 날짜가 잘못된 부분이 많이 나타났다"며 "이 책의 내용을 맹신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의문이 생길 거예요. "삼국지는 유비·관우·장비가 나오는 중국 소설책 아닌가요? 그걸 왜 '뉴스 속의 한국사'에서 소개하는 건가요?"
◇한국 고대사가 기록된 귀중한 역사책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보통 3세기 중국이 위·오·촉한의 세 나라로 갈라졌을 당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4세기에 편찬된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말해요. 그런데 역사책 '삼국지'는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233~297)란 사람이 쓴 것으로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책이에요. 진수의 '삼국지'에는 관우가 술 한 잔 식기 전에 화웅을 베고 돌아왔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요.
◇한국 고대사가 기록된 귀중한 역사책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보통 3세기 중국이 위·오·촉한의 세 나라로 갈라졌을 당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4세기에 편찬된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말해요. 그런데 역사책 '삼국지'는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233~297)란 사람이 쓴 것으로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책이에요. 진수의 '삼국지'에는 관우가 술 한 잔 식기 전에 화웅을 베고 돌아왔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요.
- ▲ /그림=김윤지
◇삼한 청년들은 등가죽을 뚫는다고?
이 책 동이전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동예)의 '무천' 같은 각 나라의 제천행사를 비롯해 각종 풍속에 대해 꽤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죠. "(부여에선) 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에선 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해 꿇어 절하면서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별채에 가도록 허락한다."
해석이 분분한 기록도 있어요. "(삼한에선) 나라에 부역이 있거나 성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가죽을 뚫고 큰 밧줄을 꿰어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이 기록에 대해 '일종의 성년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 학자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등가죽을 뚫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지게를 표현한 것'으로 본 학자도 있어요.
◇중국 역사서 속 오류를 따져봐야
이 책에는 후대에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기록도 등장해요. 부여의 영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음식가무(飮食歌舞)'란 네 글자예요. '(며칠 동안 끊임없이)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는 의미입니다. 유독 흥과 끼가 많은 한국인의 특성을 이미 오래전에 기막히게 잘 파악한 문장이라고 찬탄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앞서 나온 연구에서 보듯, 진수의 '삼국지'란 책 자체가 부정확한 부분과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바다 건너 먼 곳의 정보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기 나라 위주의 시각과 타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외국인의 편견도 곳곳에 들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용감한 부여인, 흉악한 고구려인… '中과 지리 가까우면 우호적 묘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잘 살펴보면 대체로 중국과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먼 곳까지 순서대로 기록하는 한편, 가까운 곳을 비교적 우호적으로 쓰는 듯한 경향을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가장 먼저 소개한 부여에 대해선 "성격이 강하고 용감하고 후덕해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고 쓴 반면, 고구려는 "성격이 흉악하고 급해 침략과 노략질을 즐긴다"고 기록했어요. 아직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전 초기의 고구려였지만, 아무래도 중국 측의 편파적인 시선이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