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818년 의회가 추대한 '칼 요한 14세' 즉위… 절대왕정 쇠퇴

입력 : 2020.01.29 03:09

[스웨덴의 입헌군주제]

'북방의 사자'로 불리던 구스타브 2세, 군사·정치적 능력으로 절대왕정 수립
칼 13세 이을 왕위 계승자 없자 의회가 직접 칼 요한 14세를 지명
그후 정치적 권한 점차 축소됐죠

스웨덴은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왕실 유지 비용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요. 그래서인지 스웨덴 왕실은 왕족 규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최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자 해리 왕손이 왕실로부터 '독립 선언'을 해 화제가 됐지만, 이보다 먼저 지난 2013년 스웨덴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의 막내딸인 마들렌 공주 부부가 스스로 지위를 포기해 왕족에서 제외됐어요. 스웨덴 왕실은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와 같은 입헌군주제로 바뀌게 됐을까요?

구스타브 2세가 절대 왕정 수립

17세기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절대왕정이 성립되었어요. '북방의 사자'로 불렸던 구스타브 2세(재위 1611~1632)가 즉위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죠.
스웨덴 왕실의 지위는 왕과 의회의 힘겨루기에 따라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했습니다. 왼쪽은 스웨덴의 절대 왕권을 수립한 구스타브 2세의 초상화이며, 오른쪽은 의회에 의해 선출된 칼 요한 14세(베르나도트)의 초상화입니다. 베르나도트 왕조는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착하면서 왕권이 대폭 축소됐죠.
스웨덴 왕실의 지위는 왕과 의회의 힘겨루기에 따라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했습니다. 왼쪽은 스웨덴의 절대 왕권을 수립한 구스타브 2세의 초상화이며, 오른쪽은 의회에 의해 선출된 칼 요한 14세(베르나도트)의 초상화입니다. 베르나도트 왕조는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착하면서 왕권이 대폭 축소됐죠. /위키피디아
그는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능력도 뛰어났어요. 효율적인 과세와 부역을 위해 지역별로 인구조사를 벌이고, 귀족들이 중세 시대에 누리던 특권을 회수하는 대신 국가의 요직을 맡기며 근대적 관료제를 도입했어요.

절대왕정기의 절정을 찍은 것은 구스타브 2세의 조카 손자인 칼 11세(재위 1660~1697) 때였습니다. 그는 4세에 왕이 되어 어머니와 스웨덴 귀족들의 내정 간섭을 받았어요. 하지만 계속된 전쟁 패배와 내정 실패로 16세 때 직접 정권을 잡으면서 전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죠. 1680년 의회에서 "국왕은 원하지 않으면 원로원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선언을 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어요.

엘레오노라 여왕, 의회와 타협

그러나 스웨덴 왕실은 1700~1721년 대(大)북방전쟁을 기점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1700년 작센-폴란드와 덴마크-노르웨이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맹을 맺고 스웨덴을 침공했어요. 칼 11세에 이어 즉위한 칼 12세는 열심히 싸웠으나 전사했고 스웨덴은 패배했어요.

칼 12세는 아들 없이 사망해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조카 칼 프레드리크가 서로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다투게 됐습니다. 당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왕위를 계승할 권리는 없었어요. 이에 엘레오노라는 절대 권력을 포기하고 의회에 왕위 계승권자 결정권을 넘기는 대신 자신을 여왕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구했죠.

1718년 선출된 엘레오노라 여왕은 2년 뒤 남편을 왕위에 올려 프레드리크 1세(재위 1720~1751)로 만듭니다. 프레드리크 1세는 즉위하면서 '통치조직법'을 채택해 시행하는데, 이 법에 따르면 의회 내 상임위원회 요구로 왕이 원로원을 구성하고, 중요한 국무는 원로원에서 결정해야 했어요. 즉 의회가 왕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통치조직법은 1720년부터 1772년까지 시행되는데, 스웨덴 역사에서 이 시기를 '자유시대'라고 합니다.

이후 스웨덴 왕들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대표적 인물이 덴마크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곡물자유무역 등 진보적 경제정책을 펼치며 스웨덴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구스타브 3세(재위 1771~1792)죠. 당시 스웨덴은 귀족 정당과 비(非)귀족 정당 간 대립이 극심했어요. 구스타브 3세는 이를 기회로 친위 쿠데타를 벌여 1772년 원로원 의원들과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새 헌법을 만들면서 절대 왕권으로 회귀합니다.

의회 추대로 세워진 베르나도트 왕조

그러나 구스타브 3세를 계승한 동생 칼 13세(재위 1809~1818)가 왕위를 계승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 의회가 다시 한 번 후계자를 지명하게 됐습니다. 의회는 나폴레옹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장군이었던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를 왕세자로 선택했죠. 1799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즉위 이후 유럽 대부분은 나폴레옹이나 그의 형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측근 베르나도트를 왕위에 앉히면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1818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리는 국왕 칼 요한 14세로 즉위하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의회에 많은 양보를 하게 되죠.

이후 베르나도트 왕조의 왕들은 부단히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20세기 들어 의원내각제가 정착되면서 왕의 정치적 권한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어요. 1974년엔 개헌을 통해 국왕이 갖고 있던 총리와 각료 임명권마저 의회로 넘어갔죠. 그 뒤로 스웨덴 국왕은 의회 개회식 때 새 회기의 시작을 선언하거나 대외적 국가 홍보를 하는 등 비정치적 역할만 맡게 됐습니다.



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