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600배 부유했던 페르시아 이긴 아테네, 보리의 저력

입력 : 2020.01.24 03:09

[보리]

주요작물이 보리인 척박한 환경이라 무역·상업 발전해 부유한 평민 등장
평민 목소리 커져 참정·재산권 요구
'한 줌 보리'라며 무시하던 페르시아에 대승 거두며 민주주의 힘 보여줬죠

지난 3일 미국이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무인기를 이용해 폭살했습니다. 이에 이란은 보복을 천명하고 이라크 내에 있는 미군 기지 2곳에 미사일 공격을 했지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두 나라 갈등은 일주일 만에 일단 봉합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사회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죠.

근래 들어 두 나라 갈등은 41년 전인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와 이란을 포함한 중동의 대립을 '문명의 충돌'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11세기 십자군전쟁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구한 역사를 지닌 두 문명의 충돌은 알고 보면 음식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리에서 출발한 아테네의 민주주의

최초로 이란과 전쟁을 벌였던 유럽 국가는 그리스였습니다. 기원전 490년 일어났던 페르시아 전쟁에서 당시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쳤죠. 이 전쟁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곡식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주요 작물은 보리였습니다. 그리스는 국토의 80%가 산입니다. 나머지 평지도 석회암 지대라 농사짓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밀 대신, 어디서나 잘 자라는 보리를 키워야 했죠. 하지만 보리는 쌀이나 밀에 비하면 영양도, 맛도 부족합니다. 글루텐 함량이 적어 빵을 만들어도 납작하고 딱딱하죠. 한마디로 그리스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기원전 490년 그리스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는 모습.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월터 크레인의 그림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보다 600배나 부유했고 병력도 훨씬 많았지만, 평민들이 주축이 된 아테네 군사들에게 참패했습니다.
기원전 490년 그리스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는 모습.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월터 크레인의 그림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보다 600배나 부유했고 병력도 훨씬 많았지만, 평민들이 주축이 된 아테네 군사들에게 참패했습니다. /위키피디아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환경은 그리스에서 평민들이 힘을 갖는 기반이 됐습니다. 이들은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찍이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지중해를 무대로 해상무역과 광산 개발에 나서 부를 키웠죠. 부족한 농업 생산력을 상업 활동으로 보충한 겁니다. 특히 아테네는 폴리스(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 가장 상업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민 중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든든한 경제력을 등에 업고 점차 귀족들에게 참정권과 재산권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폴리스 간의 경쟁도 평민들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폴리스 국가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국가였던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습니다. 팔랑크스(phalanx)로 불린 이 전술은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 정도로 밀집해 선 뒤 원형 방패로 몸을 가리고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입니다.

말과 마구를 갖춰야 해 비용이 많이 드는 기병과 달리, 보병은 방패와 창만 있으면 됩니다. 따라서 팔랑크스 전술은 기존 귀족이 주도하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죠. 이들은 폴리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귀족들에게 각종 권리를 요구했고, 폴리스 간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에 귀족들은 이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평민들의 힘은 아테네에서 인류 최초로 시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에 패배한 '밀의 나라' 페르시아

평민들이 주축이 된 아테네의 힘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증명됩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에덴동산에 비유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가진 '밀의 나라'였습니다. 당시 그리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보다 600배나 부유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페르시아는 든든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차지하고 파죽지세로 아테네까지 밀려들어 왔죠.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기를 거부하자, 분노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2만 명의 정예병을 보내 그리스 본토 침공에 나섭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밀을 먹던 페르시아는 보리를 먹던 아테네와 주변 폴리스 연합군에 참패를 당합니다. 그리스군은 시민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아테네 땅은 평민의 것이었고, 평민들이 직접 일군 공동체였습니다. 반면 페르시아의 군인은 노예이거나 정복된 속주의 피지배층이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를 목숨 걸고 지킬 이유가 없었죠.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한 줌 보리'라고 불렀습니다. 바위투성이 땅에서 난 보리를 먹는 가난한 그리스를 얕잡아 본 표현이었죠. 그러나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은 훗날 대제국 페르시아에 맞서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밀과 보리의 전쟁에서 보리가 완승한 셈이지요.



권은중 '음식경제사'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