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여권으로 세상 읽기] 달빛 받으면 빛나는 고사리… 마오리족 전사들 밤길 안내했죠

입력 : 2020.01.21 03:00

뉴질랜드의 '실버펀(Silver fern)'

해외여행 갈 때 꼭 챙겨야 하는 여권(旅券)은 전 세계 국가가 발행하는 일종의 신분증입니다. 여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국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죠. 교통과 통신 발달로 세계인과 만날 기회가 갈수록 늘어나는 요즘, 각국의 여권을 살펴보는 일은 재미를 넘어 세계를 배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답니다.

오늘 살펴볼 나라는 뉴질랜드입니다. 면적은 약 26만7700㎢로 한반도보다 조금 더 크지만, 인구는 482만여명으로 경기도의 절반도 채 되지 않습니다. 지구 남반구의 외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뉴질랜드 사람들은 유럽을 가려 해도 비행기로 한 번에 갈 수가 없습니다. 수도 웰링턴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 호주의 수도 캔버라까지는 서울-도쿄 거리(1159㎞)의 2배쯤인 2325㎞에 달합니다. 이처럼 외딴 땅에서 뉴질랜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뉴질랜드 여권 표지에 새겨진 뉴질랜드 국가 문장과 은빛 고사리 모양(왼쪽).
뉴질랜드 여권 표지에 새겨진 뉴질랜드 국가 문장과 은빛 고사리 모양(왼쪽). 오른쪽 사진은 뉴질랜드 여권의 속지로, 가장자리에 어린 고사리를 본뜬 코루 무늬가 그려져 있어요.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여권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뉴질랜드 여권 표지를 보면 독특한 상징이 눈에 띄어요. 가운데에는 영국 여성과 마오리족 원주민 추장이 나란히 서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국가 문장이 그려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은빛 고사리 모양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은 뉴질랜드가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 이민자 집단인 영국인들과 원주민 집단인 마오리족이 상호 공존을 약속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합의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사리 모양도 과거와 관련된 상징이죠. 뉴질랜드에는 '실버펀(Silver fern)'이라는 독특한 모양의 고사리가 자라는데 그 잎의 앞면은 여느 고사리처럼 녹색이지만 뒷면은 은색입니다. 옛날 마오리족 전사들은 낯선 길을 갈 때 고사리 잎을 뒤집어 놓으며 걸었다고 합니다. 고사리의 은색 부분이 달빛을 받으면 야광 물질처럼 빛나기 때문에 밤에도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귀향할 수 있었죠.

고사리는 여권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뉴질랜드를 상징하고 있어요. 2016년에는 고사리 문양이 들어간 새 국기 도안을 놓고 국민투표가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결과는 바꾸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나긴 했지만, 뉴질랜드에서 고사리가 갖는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사례였죠. 뉴질랜드 여권 속지 가장자리에 새겨진 꼬불꼬불한 '코루(Koru)' 무늬도 어린 고사리를 본뜬 것이에요. 이 무늬는 마오리족이 착용하는 전통 장신구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오늘날 뉴질랜드 항공 로고로도 쓰이고 있죠.

이처럼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를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개척한 나라 중 이처럼 원주민 문화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나라도 없을 거예요. 유럽계가 전체 인구의 약 75%를 차지하지만, 마오리족 등 소수 집단과 서로 공존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죠. 뉴질랜드 여권에 새겨진 고사리는 공존의 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청훈 출입국관리공무원·'비행하는 세계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