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중종 즉위 7일만에 내쳐진 왕비… 단경왕후가 잠든 곳
입력 : 2020.01.21 03:00
[경기도 양주 온릉]
진성대군이 중종반정으로 즉위하자 부인 신씨도 함께 왕비가 되지만
신하들이 역적 딸이라며 반발해 폐위… 궐 밖에서 살다가 71세에 세상 떠나
덕수궁 즉조당은 인조반정과 관계… 인조가 임금 즉위식 치른 곳이죠
지난 2019년 한 해 동안 조선의 4대 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종묘, 조선 왕릉을 다녀간 관람객이 1338만6705명으로 역대 최다였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지난해 창경궁을 야간에도 상시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덕수궁 즉조당과 준명당, 양주 온릉 등 닫혀 있던 궁궐 전각과 비공개 왕릉을 개방한 것이 역대 최다 관람객 기록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새로 개방한 온릉과 덕수궁 즉조당은 각각 조선시대 일어난 두 번의 반정(反正·임금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유적지예요.
◇'7일의 왕비'가 묻힌 곳, 온릉
경기도 양주에 있는 온릉(溫陵)은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과 관련 있는 유적지입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士禍·선비가 화를 입는 일)를 일으킨 뒤 절대 왕권을 누리면서 폭정을 일삼고 있었죠. 이에 일부 신하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이었던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뜻을 품습니다.
◇'7일의 왕비'가 묻힌 곳, 온릉
경기도 양주에 있는 온릉(溫陵)은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과 관련 있는 유적지입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士禍·선비가 화를 입는 일)를 일으킨 뒤 절대 왕권을 누리면서 폭정을 일삼고 있었죠. 이에 일부 신하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이었던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뜻을 품습니다.
- ▲ /그림=김윤지
반정 세력은 일을 도모하기 전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어느 편이 중한가"라고 묻습니다. 누이는 연산군의 부인, 딸은 진성대군의 부인이었으니 이는 곧 반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셈이었죠. 신수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반정에 반대할 뜻을 내비친 그는 결국 살해되고 맙니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은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냅니다. 다음 날 진성대군은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갖고 조선의 11대 왕 중종이 되지요. 부인 신씨 역시 함께 궁궐에 들어가 왕비(단경왕후)가 되지만,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가 반정에 반대한 역적의 딸이라며 반발하죠. 결국 단경왕후는 7일 뒤인 9월 9일 궁궐 밖으로 내쫓기게 됩니다. 이후 친정에서 쓸쓸하게 지내다가 1557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아요. 단경왕후는 훗날 영조 때 다시 왕후로 복위됐고, 그녀가 묻힌 묘도 온릉으로 승격됐지요.
◇인조반정의 주요 무대, 즉조당
즉조당은 조선의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어요. 후궁의 아들이었던 그는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가 낳은 어린 왕자 영창대군에게 역모죄를 씌워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인목왕후 역시 경운궁으로 쫓아냈죠.
하지만 광해군은 명나라를 따르지 않는 외교 정책을 펴면서 서인 세력의 반발을 사게 돼요. 이들은 결국 1623년 군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그의 조카였던 능양군을 임금으로 세우죠. 조선은 임금이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했거나 물러났을 경우 왕대비가 다음 왕위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조는 대비인 인목왕후가 머물던 경운궁으로 가서 대비에게 왕실을 상징하는 도장인 어보를 전해 받고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리게 됩니다. '인조실록'에는 인조가 경운궁의 별당에서 즉위하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별당이 바로 즉조당입니다. 이후 경운궁은 1907년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의 4대 궁궐 중 하나가 되었지요.
[연산군은 유배 후 2달 뒤에, 광해군은 18년 뒤에 세상 떠나]
반정으로 축출된 왕은 '묘호'(임금이 죽은 뒤 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이는 이름)를 받지 못해 연산군, 광해군 등 '군'으로 불리고, 무덤도 '능' 대신 '묘'라고 불립니다. 재위기간을 기록한 '실록'도 '일기'로 격하되지요.
반정으로 쫓겨난 두 임금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연산군은 1506년 강화 교동도로 유배된 뒤,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31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광해군 역시 강화도에 유배됐지만 연산군보다는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1641년 67세로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