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독특한 저음으로… '비창'은 슬프게, '봄의 제전'은 기괴하게

입력 : 2020.01.18 03:05

[목관악기 바순]

목관 악기 중 가장 음이 낮아… 낮은 음역에선 묵직, 고음에선 음산
'비창' 1악장서 쓸쓸한 느낌 더하고 '봄의 제전' 도입부에선 독주 맡아
부자연스럽게 연주해 불안함 표현

바순
바순.

어떤 나라 음식이건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내는 오묘한 맛의 조화는 늘 흥미롭습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은 다채로운 맛을 자랑하는 요리 양념처럼 다양한 악기들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음색의 변화가 감상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런데 여러 경우의 수로 나타나는 조합에서 필수 양념처럼 요긴하게 쓰이는 악기가 있어요. 바로 '바순(Bassoon)'입니다. 목관 악기 중 가장 저음을 담당하는 길쭉한 기둥 모양의 악기죠. 오케스트라에서는 비교적 뒷자리에 앉아 있지만, 17~18세기 바로크 시대부터 실내악과 관현악곡에서 열심히 활동해 왔습니다.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죠.

16세기 악기 '둘치안'에서 나와

먼저 바순의 역사와 구조를 알아볼까요? 바순의 기원은 둘치안이라는 16세기 악기입니다. 둘치안의 탄생은 154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두 개의 나무 관을 한데 묶고 그 아래를 구부러진 관으로 연결한, 현재의 바순과 비슷한 모양이었죠. 둘치안은 영국에서는 커틀, 독일에서는 파곳, 이탈리아에서는 파고토라고 했는데요, 바순은 지금까지도 파곳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순의 구조는 크게 봐서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S자 모양의 얇은 금속관을 시작으로 날개관(wing joint), 통관(butt joint),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진 긴 관(long joint), 나팔관(bell joint)으로 구성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나무 기둥 두 개를 묶어 놓은 듯한 모습인데요, 길이가 1.4m 정도로 목관 악기 중 가장 길쭉합니다. 금속관 끝에는 두 겹으로 돼 있는 리드가 있는데, 리드의 울림으로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는 오보에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바순은 나라에 따라 구멍과 키의 위치, 개수 등이 조금씩 다릅니다. 현재는 19세기 중반 요한 아담 헤켈이 만든 독일식 바순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입니다.

저음은 묵직, 고음은 음산

바순은 주로 저음을 표현하는 악기이지만 그 음색이 독특해 바로크 시대부터 작곡가들이 즐겨 다룬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비발디, 헨델, 텔레만 등이 바순의 매력을 잘 살린 협주곡과 실내악을 발표했죠. 바로크 시대 대표적 실내악 형태인 트리오 소나타에서 첼로와 함께 저음 악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중요한 악기였습니다. 저음은 묵직하고 중간 음역에서는 우스꽝스러우며 고음에 올라가면 기괴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들이 줄지어 앉아 바순을 불고 있어요. 바순은 목관 악기 중 가장 길쭉합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들이 줄지어 앉아 바순을 불고 있어요. 바순은 목관 악기 중 가장 길쭉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바순이 오케스트라에서 그 존재감을 넓힌 것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이후였습니다. 인기가 많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에서도 바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요, 교향곡 4번의 2악장,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의 첫머리 등에서 그 독특한 음색을 감상할 수 있어요. 차이콥스키 특유의 슬프고 쓸쓸한 느낌의 악상이 바순과 아주 잘 어울리죠.

독특한 음색으로 음악에 맛 더해

일부러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느낌으로 바순을 연주하게 해 그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작품도 있습니다. "오늘 시작을 장식할 불운한 연주자가 누구죠?" 1988년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페스티벌에서 리허설을 하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짓궂은 말투로 이런 농담을 던집니다. 이들이 연주할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곡 '봄의 제전'인데요, 이 곡의 시작은 바순의 독주로 채워집니다. 이 부분은 저음 악기인 바순으로 연주하기 무척 어려운 고음으로 이뤄져 있어 번스타인이 그렇게 물어본 것이죠. 여기서 바순이 연주하는 선율은 작품에서 요구하는 어딘가 불안하고 일그러진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바순만 낼 수 있는 음색으로 독특한 캐릭터를 표현할 수도 있어요.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에서는 마법사 스승이 외출한 사이 제자가 서툰 솜씨로 주문을 외워 빗자루에 일을 시키는 줄거리를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마법에 걸린 빗자루가 뒤뚱거리며 물을 긷는 모습을 바순이 그려냅니다.

또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곡 '피터와 늑대'에서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바순은 완고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맡아 낮은 음역에서 점잖고 위엄 있는 멜로디를 연주하죠.

오페라에 등장하는 바순 연주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가운데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전주가 아닐까 합니다. 솔로를 맡아 연주하는 바순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애수 어린 테너의 목소리가 등장하기 전 울려 퍼져 청중을 노래에 더욱 집중하게 하죠.

무대의 중앙에 나서는 일은 별로 없지만, 바순의 독특한 외모는 어디서든 눈에 띕니다.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엉뚱하고 재치 있게 앙상블의 맛을 더해주는 바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바순을 독주 악기로 자리 매김시킨 바수니스트 '클라우스 투네만']

1989년 필립스에서 발매한 모차르트의 협주곡 앨범 사진

독일 음악가 클라우스 투네만(Thunemann·83)은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쓰이는 악기로 인식되던 바순을 당당한 독주 악기로 인식시키는 데 공헌했습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1937년 태어난 그는 피아노를 배우다가 18세 때 바순에 흥미를 느껴 전공을 바꿉니다.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본격적인 연마를 시작한 투네만은 학교를 졸업하고 함부르크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주자로 16년 동안 일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빈틈없이 정확한 기교와 풍부한 감성으로 세계 정상급의 음악인들과 녹음한 그의 음반은 바순의 레퍼토리 거의 모두를 망라합니다. 비발디, 모차르트, 베버, 생상스 등의 대표적 독주 작품들에서 투네만이 후대 바순 연주자에게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그중에서도 1989년 필립스(현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모차르트의 협주곡 앨범〈작은 사진〉을 즐겨 듣습니다. 앨범 표지 사진 오른쪽사람이 투네만입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