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영하 20도에서도 얼음 표면 물분자는 얼지않아 미끄럽죠

입력 : 2020.01.16 03:00

[빙판이 미끄러운 이유]
얼음 표면의 보이지 않는 얇은 물층… 일반 물과 달리 기름처럼 미끄러워
압력·마찰력 때문에 미끄럽다고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있죠

지난 6일 경남 합천 국도에서 차량 41대가 잇따라 추돌해 운전자 등 10명이 다쳤습니다. '블랙 아이스(black ice)' 때문이었습니다.

블랙 아이스는 길 위에 얇게 얼음이 어는 현상을 말합니다. 얼음 자체는 검은색이 아니고 투명하지만, 얼음 아래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가 마치 검은색 얼음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블랙 아이스라고 부르죠. 얼음층이 얇고 투명해 눈에 띄지 않다 보니 눈으로 이를 확인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빙판길은 왜 그렇게 미끄러운 걸까요.

압력·마찰열 때문이라 잘못 알려져

꽁꽁 얼어붙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선수는 어떻게 미끄러지듯 이동할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압력'과 '마찰열'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배우듯 압력이 높아지면 녹는점이 낮아지죠. 압력이 강하면 영하에서도 얼음이 물로 녹아 미끄러워진다는 겁니다. 또 물체가 움직일 때는 마찰열이 생기니까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녹인다는 겁니다. 과학적 상식에 들어맞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1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얼음이 미끄럽다고 생각했어요.

[재미있는 과학] 영하 20도에서도 얼음 표면 물분자는 얼지않아 미끄럽죠
/그래픽=안병현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좀 이상한 설명입니다. 스케이트를 신으면 무게가 날에 쏠리면서 대기압의 수백 배에 달하는 압력이 생깁니다. 그래도 녹는점은 3~4도 내려갈 뿐입니다. 영하 10도 정도 되는 상황이면 압력으로 얼음이 녹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죠.

마찰열로 인해 얼음이 녹는다는 것도 모순점이 있어요. 마찰열은 움직여야 생기는데,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미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죠.

얼음 표면엔 보이지 않는 물이 있다

영국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1849년 얼음 벽돌 실험을 통해 빙판 표면에 물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흙을 빚어 구운 벽돌 두 장은 서로 달라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음 벽돌 두 장은 쉽게 달라붙죠. 그는 얼음 벽돌 표면의 액체층이 얼어붙으며 벽돌이 달라붙는다고 설명했어요. 이글루를 지을 때 이런 현상을 '사전용해(事前溶解·premelting)'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패러데이의 이론은 '영하의 온도에 물과 얼음이 공존한다'는 주장이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고요.

1996년 미국 연구진은 얼음 표면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물 층이 존재한다는 '표피층 이론'을 증명합니다. 얼음 표면에 전자와 이온 빔을 쏘아 얼음 표면을 관찰해봤더니 영하 20도에서도 얼음 표면에 물 분자가 액체로 남아 있는 걸 관찰했어요.

물 분자는 얼어붙으면서 서로 상하좌우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얼음 표면은 어떨까요. 표면 아래는 얼음, 위는 공기라서 다른 물 분자와 연결이 약합니다. 그 결과 얼음 내부의 물 분자보다 꽤 불안정한 상태로 있습니다. 2017년 논문에 따르면 얼음 표면층 물 분자는 영하 70도에서도 액체 상태였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요.

기름처럼 미끄럽다

그런데 다른 의문이 또 듭니다. 빙판이 미끄러운 이유가 매끄러운 얼음 표면에 얇은 물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면, 역시 매끄러운 대리석이나 장판 위에 물을 뿌려도 그만큼 미끄러워야 할 겁니다. 그러나 얼음 위가 훨씬 미끄럽지요.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등 공동연구팀이 답을 내놨습니다. 얼음 표면에 물 상태로 남아 있는 분자 층은 일반적인 물과 달리 기름처럼 미끄러운 상태라는 걸 실험으로 증명한 겁니다.

연구진은 얼음 표피층이 기름처럼 미끄러운 이유에 대해서 이런 가설도 내놨습니다. 얼음 표면이 물체에 눌리면 그 충격으로 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의 작은 얼음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 표피층의 물과 섞입니다. 그 결과 물도 얼음도 아닌 '제3의 물체'가 되면서 기름처럼 미끄러워진다는 겁니다.

얼음이 미끄럽다는 건 상식이지만 과학적 원리는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과학을 알아가는 묘미죠.


[쇼트트랙 빙상 온도는 영하 7도… 얼음이 가장 미끄러운 온도래요]

그렇다면 얼음은 몇 도에서 가장 미끄러울까요? 1992년 네덜란드 연구진의 논문을 보면 '얼음 표면이 영하 7도일 때 마찰력이 가장 낮다'는 측정 결과가 나옵니다.

온도에 따라 얼음 질이 바뀌다 보니 동계 스포츠는 빙상 온도 관리에 민감합니다. 빙상 표면 온도를 영하 7도에 맞추면 선수들이 더 빨리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는 얘기니까요. 동시에 피겨스케이팅이나 컬링은 너무 미끄러우면 도리어 경기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동계올림픽 때 얼음은 '아이스 테크니션'이라 부르는 장인들이 특별히 관리합니다. 보통 쇼트트랙 경기장은 영하 7도, 피겨는 영하 3도 정도에 맞춥니다. 강한 힘으로 얼음을 지치고 나가는 아이스하키는 영하 9도 정도가 좋다고 하고요.

얼음은 영하 40도 아래로 떨어지면 미끄러움이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마틴 트러퍼 알래스카대 물리학 교수가 2017년 얼음 표면을 온도별로 실험을 해봤더니 영하 40도부터는 표면이 사포처럼 까끌까끌해졌다고 합니다.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