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장영실 아닌 문종의 발명품… 2㎜ 간격으로 빗물 측정했죠

입력 : 2020.01.14 03:09

[측우기]

가뭄 걱정하던 세자 시절의 문종, 땅에선 빗물 재기 어려워 고안했대요
고을마다 배치해 강우량 보고받아…
표준화된 세계 최초의 측우기지만 재난 예방에 활용했는지는 불분명

조선 시대의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인 측우기(測雨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는 뉴스가 최근 나왔어요. 문화재청은 기상청에 있는 보물 561호 '금영(錦營) 측우기'를 '공주 감영 측우기'란 명칭으로 바꿔 국보로 승격 예고했고, 측우기 받침인 측우대 두 점도 함께 국보로 승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진 이 측우기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15세기 획기적인 발명품을 계승한 유물이라는 거예요.

◇측우기 발명자는 조선 5대 왕 문종

여기서 잠깐!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 볼게요. 측우기란 내린 비의 양, 즉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럼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장영실'이란 답변이 많이 들리네요. 애석하지만 '땡!', 틀렸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선 '세종실록' 1441년(세종 23년) 음력 4월 29일의 기록을 들여다봐야 해요.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고 젖어 들어간 양을 봤다. 그러나 정확한 양을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둬 빗물이 그릇에 괸 양을 실험했다.'

실록에는 이렇게 측우기를 처음 만든 이가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었던 세자 이향이었다고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향은 훗날 조선 5대 임금 문종(1414~1452)이 되지요. 그럼 왜 장영실이라고 잘못 알려졌을까요? 장영실은 세종 때 과학자고, 측우기도 세종 때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2㎜ 단위까지 측정해 보고

세자 이향은 '땅에 빗물이 스민 깊이는 토양의 습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빗물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없다'는 고민 끝에 측우기를 고안했어요.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442년 음력 5월 8일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보고 제도가 확정됐습니다. 강우량 측정 도구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쓰는 표준화된 측우기로는 세계 최초였다고 합니다.
측우기의 탄생 일러스트
그림=김윤지

측우기는 주철로 만든 원통형 그릇으로, 깊이 30㎝, 지름 15㎝ 정도 규격이었어요. 돌로 만든 측우대에 측우기를 올려놓고 비가 온 뒤 측우기 속 빗물의 높이를 푼(分·당시 기준으로 약 2㎜)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해 보고했습니다. 전국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도 측우기를 나눠줘 비가 오고 갠 시간과 빗물 수심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했어요. 임진왜란 이후 이런 관측 제도의 명맥이 잠시 끊겼다가, 1770년(영조 46년) 부활돼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과학기술과 애민(愛民) 정신의 산물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측우기는 조선 시대에 충남 지역을 관할했던 공주 감영에 설치했던 것입니다. 1915년 일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반출했다가 1971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양의 우량계는 우리보다 약 220년 늦은 1662년 처음 만들어졌죠. 하지만 실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측우기는 우리 전통 과학기술이 상당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애민(愛民) 정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측우기를 남들보다 앞서 만들었지만 잘 활용했던 걸까요? 조선이 측우기로 기록한 강수량 정보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재난 예방에 활용했다는 증거는 분명치 않습니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지만, 서양처럼 출판물을 대량으로 찍어내 대중을 계몽하지 못했지요. 이것이 뛰어난 과학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전근대 한국의 한계 아닐까요?

[문종은 고려사 편찬도 주도]

측우기를 만든 세종의 아들 이향, 즉 조선 5대 왕 문종(재위 1450~1452)은 조선 왕 중 임금의 맏아들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군주입니다. '동국병감' '고려사'의 편찬과 병제 개혁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개인사는 무척 불행했습니다. 첫째, 둘째 부인이 잇달아 쫓겨났고, 세 번째 부인 현덕왕후는 아들(훗날 단종)을 낳은 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종 자신도 왕위에 오른 뒤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죠. 단종은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에게 사실상 왕위를 빼앗기고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