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화장하는 여인, 탄광촌 광부… 근현대 100년 한국인의 얼굴들

입력 : 2020.01.11 03:05

['한국 근현대인물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展]

산수화가 대부분이던 한국 전통미술… 20세기 들어서며 인물화 대폭 늘어
외출 준비하는 여인 그린 인물화, 전통적 여성상과 다른 새로운 시도
직접 탄광서 일하며 그린 광부 얼굴 화면 가득 채워 고단함 생생히 담아

서양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주된 주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물화나 인물상(像)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그려지고 만들어졌지요. 특히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인간에게서 찾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 나라에서 인물상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인물화보다 산수화가 많아요. 양반들은 자연의 한결같음을 예찬했고, 평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야 했으니 자연의 영향이 클 수밖에요. 다만 우리나라 옛 그림에 인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1676~1759)의 산수화엔 골짜기를 굽이굽이 걸어가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미만 한 크기로 그려져 있지요. 18세기 말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선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큼직하게 나타나기도 해요.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화풍에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요. 사람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차지하는 그림이 많이 늘어나거든요.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 20세기에는 '인간의 삶'이 가장 실감 나는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죠. 화가들도 자연스레 저 멀리 자연에 뒀던 눈길을 근처의 사람들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서울 종로 갤러리현대에서 '한국 근현대 인물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어요. 20세기 이후 100여 년간의 한국 미술을 인물화를 중심으로 되짚는 이 전시는 오는 3월 1일까지 계속됩니다.

작품1 - 김인승 '욕후의 화장' 1955, 캔버스에 유채(왼쪽). 작품2 - 황재형 '광부' 1980년대, 캔버스에 유채(오른쪽).
작품1 - 김인승 '욕후의 화장' 1955, 캔버스에 유채(왼쪽). 작품2 - 황재형 '광부' 1980년대, 캔버스에 유채(오른쪽). /갤러리현대

작품1을 볼까요? 화가 김인승(1910~2001)이 젊은 여인을 모델로 그린 것인데, 누구의 초상이라고 하는 대신 '욕후(浴後)의 화장'이라는 제목을 붙였네요. 목욕 후에 외출 준비를 하며 립스틱을 바르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의자 등받이에 분홍색 옷이 걸쳐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주인공은 조금 후에 데이트 약속이 있는 모양이에요. 1955년에 그린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요즘 여인처럼 세련돼 보이네요. 이 무렵 여성을 주제로 한 인물화는 어머니나 아내를 소재로 삼은 것이 많았어요. 그러나 작가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도시의 세련된 새로운 여인상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작품2의 황재형(68) 작가는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부의 얼굴을 크게 확대해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1980년대 탄광촌에 정착해 끊임없이 광부의 고된 표정을 그려오던 작가는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몸소 탄광 일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날마다 목숨을 걸고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험한 탄광으로 들어가는 삶을 체험한 덕분에, 그는 노동의 암울한 현장을 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지요.

작품3 -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00, 칠판에 오일파스텔, LCD모니터.
작품3 -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00, 칠판에 오일파스텔, LCD모니터. /갤러리현대
작품3은 김명희(71) 작가가 그린 '김치 담그는 날'이에요. 이 그림은 사실 작가의 자화상입니다. 작가는 강원도에 있는 어느 폐교를 작업장으로 쓰면서 버려진 칠판을 캔버스로 활용해 이 그림을 그렸어요. 먹음직스러운 김치가 탄생하려면 마늘을 까고, 파 껍질을 벗겨 씻고, 무를 썰고, 배추를 절이는 등 눈에 띄지 않는 자잘한 일이 아주 많지요. 그렇게 재료를 다듬다 보면 훌쩍 하루가 지나가 버려요. 화가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그림을 완성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기까지 남들은 모르는 챙겨야 할 일이 수십 가지랍니다. 고요하지만 고단한 예술가의 일상을 김장이라는 소재에 빗대 표현한 것이지요.
작품4 - 류병엽 '광화문의 아침' 1987~2009, 캔버스에 유채.
작품4 - 류병엽 '광화문의 아침' 1987~2009, 캔버스에 유채. /갤러리현대

작품4는 화가 류병엽(1938~2013)이 20년 넘는 시간을 통해 완성한 '광화문의 아침'이에요. 그림을 구상한 것은 1987년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그 후 작가는 2009년까지 오랜 세월 동안 광화문 네거리에서 아침마다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그 사람들과 마주친 기억들이 이 그림 속에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 있습니다. 여기 그려진 인물들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광화문을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겹겹이 합친 결과랍니다.

이렇듯 한국 근현대 인물화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난 100여 년간 살아온 삶의 흔적이 스며 있어요. 그림 하나하나마다 뜻깊은 사연이 있어 쉽게 발을 옮기기 어려울 거예요.

[도쿄미술학교 최초 한국 유학생, 푸른 두루마기의 자화상 그렸죠]

고희동의 자화상

우리나라 근대 미술은 서양화 기법의 그림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번 전시에는 일본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에서 공부한 초창기 서양화가들의 인물화 여섯 점이 소개됩니다.

이 중 고희동(1886~1965)은 1909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해 최초의 서양미술 유학생이 됩니다. 그가 1915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자화상'〈그림〉을 볼까요? 당시 그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였지만,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쓰던 정자관을 쓰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어 조선인의 정체성을 드러냈어요. 이후 김관호, 이종우, 오지호, 김용준 등도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서양화가로 활동합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