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굴드·리히터, 거장의 연주와 삶… 100편의 다큐에 담았죠

입력 : 2020.01.04 03:05

[다큐멘터리 감독 '브뤼노 몽생종']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다큐 영화감독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담은 작품서 바흐 연주장면 화제 되며 이름 알려
인지도 그리 높지 않은 연주자들, 몽생종 다큐로 단숨에 유명해지기도

새해가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절대 기다려 주는 법이 없죠. 말과 글, 소리와 사진으로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포착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귀로 듣고 감상하는 클래식 음악을 눈으로도 즐기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20세기 이후 음악계를 주름잡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연주와 그 예술, 나아가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업이 등장했기 때문이죠. 프랑스 출신으로 클래식계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브뤼노 몽생종(Monsaingeon·77)의 작업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1972년부터 100편 가까운 음악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몽생종은 단순히 연주 모습만 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 완벽에 이르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과 고민, 그 외 일상에서 겪게 되는 사소한 사건도 다룹니다. 아울러 음악가들 삶을 통해 현대사도 설명하고 있죠.

바이올린 연주자에서 영화감독으로

몽생종은 영화감독 이전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편곡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초창기 작업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1999)을 들 수 있습니다. 몽생종은 10대 때 메뉴인의 연주를 처음 듣고 강렬한 매력을 느꼈어요. 그 후 메뉴인의 음악 인생 전체를 영상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972년부터 시작된 메뉴인과의 작업은 메뉴인이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메뉴인이 중국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열린 장벽(The Open Wall)'(1982), 러시아 투어를 담은 '러시아로 돌아간 메뉴인'(1988)이 대표적입니다.

1977년 프랑스 파리에서 예후디 메뉴인(오른쪽)과 협주 중인 브뤼노 몽생종.
1977년 프랑스 파리에서 예후디 메뉴인(오른쪽)과 협주 중인 브뤼노 몽생종. /브뤼노 몽생종 홈페이지

몽생종을 널리 알린 것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1974년 '연금술사'라는 제목의 단편 필름 네 개를 시작으로, 몽생종은 1981년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을 영화로 만들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어요.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굴드가 1955년 데뷔 음반을 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레퍼토리이기도 했죠. 몽생종은 독특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지휘하는 듯 손을 움직이고 때로는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굴드의 모습은 영상으로 봐도 인상적입니다.

몽생종과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왼쪽).
몽생종과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왼쪽). /브뤼노 몽생종 홈페이지

몽생종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작품 목록) 중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러시아 음악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러시아를 제2의 고향이라 부르는 몽생종은 러시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그와 영상으로 인연을 맺은 러시아 음악가들은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등이었습니다. 모두 구소련 시대를 살면서 불안하고 어지러웠던 20세기 후반을 견뎌낸 인물이었죠. 때론 독재정권과 정치에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했던 음악가들의 삶을 몽생종은 생생한 증언과 고증을 통해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인민의 예술가?'(1994),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불굴의 활'(2018) 등에서 철의 장막에 가렸던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영상으로 신인 음악가 발굴 및 소개

그런가 하면 몽생종은 지명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연주자들을 자신의 영화를 통해 단숨에 유명 음악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피아니스트 다비드 프레가 대표적입니다. 글렌 굴드를 연상시키는 무대 매너와 독특한 해석으로 바흐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영화로 담아내 널리 알려집니다. 프레는 영화를 통해 아이돌 스타를 연상시키는 외모로도 인기를 얻었죠.

영화 ‘에니그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히터(오른쪽).
영화 ‘에니그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히터(오른쪽). /브뤼노 몽생종 홈페이지
당대 최고 실력을 지녔지만, 대중에게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미스터리한 인물로 생각되었던 피아니스트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모습을 널리 알린 것도 몽생종이 만든 실황 영상이었습니다. 2002년 파리 샹젤리제 독주회를 담은 영상은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였던 소콜로프가 건재함을 알렸습니다. 소콜로프는 그 후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실황 녹음들을 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합니다. 몽생종은 이후 소콜로프의 2013년 베를린 필하모니 홀 독주회 영상도 촬영합니다.
2008년 영화 촬영 중인 피아니스트 다비드 프레(왼쪽)와 몽생종.
2008년 영화 촬영 중인 피아니스트 다비드 프레(왼쪽)와 몽생종. /브뤼노 몽생종 홈페이지

브뤼노 몽생종은 홈페이지에서 자기 영화를 소개하면서 작곡가들이 작품 번호로 '오푸스(OP.)'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 번호를 붙여 놨습니다. "저는 작곡을 하지 않지만,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는 것을 마치 음표를 하나하나 쓰는 작곡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몽생종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죠. 카메라 뒤가 아닌 음악가 입장에서 함께 생각하고 공감하면서 만들어진 그의 영화를 클래식 팬들이 신뢰하고 갈채를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라 생각합니다.

[촬영 피하던 피아니스트 리히터, 몰래카메라로 인터뷰 담아 화제]

몽생종이 1998년 발표한 영화 'Enigma(수수께끼)'는 피아노 애호가들에게 큰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던 스뱌토슬라프 리히터(1915~1997)의 육성이 담긴 희귀한 자료였기 때문이죠. 언론과의 인터뷰나 촬영 등을 기피하는 성격 때문에 은둔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리히터는 일생 따라다닌 루머나 잘못된 기록 등을 바로잡기 위해 말년에 몽생종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영상은 놀랍게도 '몰래 카메라'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카메라를 극도로 싫어하는 리히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몽생종의 결정이었죠. 리히터도 인터뷰를 하던 응접실의 가구 사이에 숨겨 놓은 카메라를 눈치 채긴 했지만,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부드럽게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민한 음악가 주인공을 촬영하기 위해 그를 배려한 몽생종의 세심한 노력과 집념이 빛을 발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