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태국 現왕조 창시자… 베트남·라오스까지 세력 넓혔죠
입력 : 2019.12.25 03:00
[라마 1세]
1782년, 민심 잃은 딱신 왕 폐위 후 백성 지지 받으며 왕으로 추대돼
방콕으로 수도 옮긴 후 사원 짓고 불교 개혁하며 왕권 안정화시켜
전성기 때 세력은 지금 영토의 두배
◇왕의 오른팔에서 새 국왕으로
라마 1세는 1736년 태국(당시 나라 이름은 시암) 아유타야 왕조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적 이름은 '통 두엉'이었어요. 당시는 약 400년에 걸쳐 동남아 지역 최고 강국이던 태국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하던 시기입니다. 1767년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현재 미얀마)의 침략으로 수도 아유타야가 점령당하며 멸망합니다.
왕조는 멸망했지만, 태국 사람들은 버마에 맞서 계속 싸웠습니다. 결국 아유타야 왕조의 장군이던 딱신이 1767년 버마를 물리치고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통 두엉은 이 시기 딱신의 오른팔 역할을 했어요. 함께 버마에 맞서 싸웠고, 딱신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15년 동안 정복 전쟁 11차례에 참여해 군사적 재능을 뽐냈어요.
그러나 딱신은 왕위에 오른 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잔혹한 정치를 펴게 됩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채찍질했다는 기록까지 있어요. 왕비와 왕자가 그런 취급을 받았을 정도이니,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결국 통 두엉이 태국 백성의 지지를 받아 1782년 새로운 왕에 추대됩니다.
과거 통 두엉은 1770년 캄보디아 원정을 떠나면서 딱신 왕에게서 '짜오프라야 짜끄리'라는 높은 관직을 받아요. 이후 이 관직 이름은 통 두엉의 이름처럼 쓰였고, 왕위에 오르면서 관직명의 일부인 '짜끄리'를 왕조 이름으로 삼고 자신은 라마 1세가 돼 나라를 다스립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정복
라마 1세는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르며 영토를 확장했어요. 우선 그는 수도를 짜오프라야강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방콕을 수도로 삼습니다. 기존 수도였던 톤부리는 짜오프라야강 서쪽에 있어 서쪽에 있는 버마의 공격에 취약했거든요. 이때 아유타야의 폐허에서 꺼낸 자재로 도시를 건설해 방콕이 아유타야를 계승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 ▲ 태국 방콕의 불교 사원 '왓 프라깨우'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 모습. 태국 짜끄리 왕조를 시작한 라마 1세가 라오스와 싸워 이긴 뒤 되찾았습니다. 라마 1세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불교를 개혁해 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위키피디아
◇불교 개혁으로 민심 달래
라마 1세는 백성을 달래기 위해 불교 개혁에도 착수합니다. 태국은 예로부터 불심이 깊은 나라로 유명한데요, 아유타야 왕조 말기부터 불교 승려들이 계율을 어기는 등 백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는 계율을 어긴 승려를 강력하게 처벌하게 하고 경건한 승려를 불교 지도자로 임명합니다. 또 승려 218명과 불교학자 32명을 불러 모아 불경을 개정합니다. 왕궁에는 '왓 프라깨우' 불교 사원을 새로 짓습니다. 라마 1세는 딱신 왕 시절에 라오스와 전쟁을 하면서 14세기 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에메랄드 불상을 되찾아왔었는데 그 불상을 이 사원에 모셨습니다.
[19세기 라마 5세 '대나무 외교'… 영토 일부 내줬지만 주권 지켜]
지금 태국 영토는 라마 1세 시절의 절반 수준입니다. 하지만 태국에서는 이를 라마 5세(1868~1910)의 '대나무 외교'의 성과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태국은 동남아에서 영국·프랑스 등 세계열강에 맞서 끝까지 독립을 지켰던 얼마 안 되는 나라거든요.
대나무는 강한 바람이 불어도 크게 휘청거릴 뿐 땅에 굳건히 박은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태국은 19세기 말 서쪽의 영국령 인도제국과 동쪽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양쪽에서 공격받았습니다. 당시 태국 국왕 라마 5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이 국가들에 영토를 계속 떼어주면서도 주권을 지키고 근대화를 이룹니다. 살은 내주고 뼈는 지켰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