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유배지 강진서 받은 아내의 편지… 작은 책으로 만들었죠
[정약용의 '하피첩']
함께 받은 아내의 치마에 종이 덧대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내용 담았어요
화가 이중섭은 떨어져 사는 가족에게 사랑하는 마음 담은 그림편지 보내
세상 떠난 남편에게 쓴 400년전 편지… 해외 잡지서 애틋한 사연 소개되기도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받은 편지
"때는 병인년 섣달, 천지는 모두가 꽁꽁 얼었는데/ 눈 위에 찬 기운이 서리고, 수심만 늘어가네/ 등불 아래 슬픔만 가득하여 더더욱 잠 못 들어/ 임과 이별한 지 7년, 만날 날은 아득하네."
1807년 정약용(1762~1836)은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아내 홍혜완이 보낸 이런 편지를 받아봅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시였습니다. 홍혜완은 '기강진적중(奇康津謫中)'이라는 제목의 이 시와 함께 시집올 때 입은 다섯 폭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냅니다.
정약용은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종이를 덧대고 그곳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담은 편지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하피첩(霞帔帖·노을빛 치마로 만든 작은 책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편지로만 마음을 전하던 부부는 1818년 가을, 정약용이 56세가 되어서야 귀양이 끝나 다시 만나게 됩니다. 정약용은 1836년 2월 22일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날은 다름 아닌 정약용·홍혜완 부부의 60주년 결혼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하네요.
◇세상 떠난 남편에게 보낸 편지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셨나요? 나는 당신에게 늘 말하기를 '여보, 남들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을까요?'라고 말하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습니다."
- ▲ /그림=김윤지
1586년 6월 조선 시대 양반 이응태의 아내가 31세 젊은 나이로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한글로 적어 남편 시신과 함께 묘에 묻은 편지입니다. 1998년 이응태의 묘를 이장하던 중 시신의 가슴 부분에 놓인 편지가 발견됐어요. 미투리 등 여러 유품도 함께 나왔는데, 미투리는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애틋한 사연은 세계적 인문지리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영국 고고학잡지 '앤티쿼티' 등에도 소개됐는데요. 430여 년 전 여성이 남긴 친필 편지 원본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그림편지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이중섭(1916~1956)은 어려움 속에도 아내와 어린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써보냈습니다. 이중섭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지자 아내와 아들들을 일본 처가로 보냈습니다. 혼자 남은 그는 막노동으로 입에 풀칠하고 그 외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가족에게 편지를 계속 보냅니다. 수십 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그림편지를 비롯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편지와 그림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지요.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보내며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감사와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써서 보내면 어떨까요?
[품삯 받고 편지 전해주던 조선시대 배달부 '전인']
조선시대에는 품삯을 받고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전문 배달꾼이 편지를 전해줬습니다. 이들은 전인(專人·전해주는 사람)이라고 불렸어요. 오늘날의 배달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런 전인은 궁궐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궁궐로 들고 나는 편지는 '글월비자'가 맡아 전달했습니다. 비자(婢子)는 궁궐에서 심부름을 맡은 여자를 부르는 말인데요, 글월을 전하는 심부름을 맡은 비자라 이런 이름으로 불렸어요. 이들은 허리에 검은 띠를 매고 다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