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경일의 심리학 한토막] 고민 없이 빨리 판단하려는 경향… 혈액형별 성격론이 대표적 사례

입력 : 2019.12.24 03:05

인지적 구두쇠

종종 "혈액형이 뭐야?"라는 질문을 받거나 "너 B형이지?" 같이 특정 혈액형이 아니냐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는 "너는 A형이니까 소심하구나" 같은 말을 합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하나의 편견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돈을 잘 쓰지 않는 사람을 구두쇠라고 합니다. 인지란 쉽게 말하자면 생각입니다. 그러니 인지적 구두쇠라 함은 '인간은 생각을 잘 하지 않으려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깊게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죠. 이 말은 심리학자 수전 피스크(Fiske)와 셸리 테일러(Taylor)가 1991년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인종, 지역, 학벌, 혈액형 등을 근거로 가지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인지적 구두쇠 행위(cognitive miserliness)'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람들은 주어진 자료를 합리적으로 종합해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가능한 한 심적 노력을 덜 들이면서 빨리 판단하고자 한다는 지적입니다.
인간은 어떤 생각을 깊게 하기보다는 심적 노력을 덜 들이면서 빨리 판단하고자 합니다. 정신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인데요, 이 때문에 혈액형 성격론 같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빠지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떤 생각을 깊게 하기보다는 심적 노력을 덜 들이면서 빨리 판단하고자 합니다. 정신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인데요, 이 때문에 혈액형 성격론 같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빠지기도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렇게 사람이 인지적 구두쇠가 된 이유는 '정신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편견 없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건을 사안마다 처음부터 새로 검토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하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듭니다. '저 친구는 B형이라 제멋대로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왜 저럴까'라고 매번 생각하는 사람보다 신경을 훨씬 덜 쓰겠지요. 여러 상표의 물건이 있을 때 써본 걸 계속 쓰는 것도 비슷합니다. 처음 상표를 고를 때 이것저것 비교해보며 에너지를 많이 썼으니, 다음부터는 생각하는 데 힘을 쓰지 않고 그냥 사던 걸 사는 겁니다. 인지적 구두쇠여서 효율적 행동이 가능한 겁니다. 혈액형 성격론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알려져도 꾸준히 살아남는 것은 '사소한 정보로 많은 걸 설명해줘서 에너지를 절약해주는 모델'이기 때문일 겁니다. 인지적 구두쇠인 인간은 아차 하면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게 된다는 걸 기억해야겠죠.

인지적 구두쇠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기억의 편집' 현상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창틀' '블라인드' '커튼' '유리창'이라는 낱말을 불러주고 시간이 흐르고서 들었던 단어를 기억나는 대로 써보라고 합니다. 그럼 '창문'이라는, 불러주지 않았던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앞서 들려준 단어는 모두 '창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여러 단어를 각각 기억하는 대신 그 정보를 아우르는 '창문'을 기억하기로 했고, 그 단어를 들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죠.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