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젊어선 건반 위 야생마, 만년엔 무대의 로맨티시스트

입력 : 2019.12.21 03:00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손 평평하게 펴 힘주어 튕기듯 연주… 강렬한 음향과 가공할 기교 뽐내
흉내 내려던 사람들은 고배 마셨죠

1986년 공연 '호로비츠 인 모스코'
여든셋 거장의 부드러운 연주가 세계인에 평화 메시지와 감동 선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2019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작은 사진)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호로비츠는 많은 팬을 지녔던 연주자인 동시에, 개성 넘치는 해석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주법으로 후대의 피아니스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일하던 유대인 사무일 호로비츠의 막내로 태어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운 후 불과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키예프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원래는 연주자보다 작곡가를 지망했으나,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직후 집안 형편이 기울자 피아니스트로 생업에 뛰어들었죠. 그의 데뷔는 1920년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서 이루어졌는데, 놀랍게도 이미 2시간 분량의 독주회 레퍼토리를 10개나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1925년 12월 베를린에서 가진 서유럽 데뷔 음악회에서 호로비츠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 1악장 첫머리의 카덴차(독주로 연주하는 화려한 부분)를 듣고 놀란 지휘자가 지휘대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구경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928년 1월 카네기홀 데뷔 무대에서도 호로비츠는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이 무대 역시 오랫동안 회자되었어요. 지휘자인 토머스 비첨이 이끈 협주곡의 템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젊은 피아니스트는 피날레인 3악장에서 지휘를 무시하고 엄청나게 빠른 템포로 질주하듯 연주했습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무척 당황했지만 청중들은 야생마와 같이 거칠게 도발하는 피아니스트의 열정적인 연주에 환호했죠. 인기 절정의 피아니스트가 된 호로비츠는 1933년 명지휘자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와 만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연주했고 이후 많은 음악회와 음반을 함께 했습니다.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의 딸인 완다와 결혼해 두 사람은 사위와 장인 사이가 되었죠.

가공할 기교와 독특한 해석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호로비츠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인지 자주 몸이 아팠어요. 그의 경력에는 네 차례나 공백기가 있었는데요,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이상 무대를 떠나 있었습니다. '잠정적인 은퇴' 상태를 거듭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그는 더 신비로워졌고, 존재감도 커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65년 5월 카네기홀 독주회였죠. 무려 12년 만의 무대 복귀인 만큼 팬들의 관심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는데요, 음악회 표를 구하기 위해 이틀 전부터 팬들이 몇 블록에 걸쳐 줄을 서서 뉴스가 됐습니다. 대성공으로 끝난 이날의 음악회는 라이브 녹음본으로 남아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그때의 흥분을 전합니다.

1965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12년의 공백 끝에 돌아와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마치자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1965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12년의 공백 끝에 돌아와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마치자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20세기 대표 피아니스트인 호로비츠는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호로비츠의 음악회를 직접 경험했거나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그의 믿어지지 않는 기교, 다양한 색채를 지닌 피아노의 음색과 함께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주법에 놀라곤 했습니다. 피아노를 칠 때 호로비츠의 손 모양은 모범적인 피아노 주법과는 거리가 멀었죠.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둥글게 구부러진 손 모양이 아니라 손 전체를 평평하게 펴서 건반을 누르고, 손가락을 아래위로 움직이는 동작도 중력을 이용하기보다는 힘을 주어 튕기는 방법을 썼습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금기 사항에 가까운 주법에서 나오는 변화무쌍한 색채와 날렵한 기교적 효과,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강렬한 음향은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들도 매료시켰죠. 호로비츠의 연주를 한 번이라도 들은 연주자들은 그 연주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을 일방적으로 흉내 내거나 따르려고 한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실패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호로비츠의 주법과 음악 세계는 오직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져 유일무이하다고 하겠습니다.

만년의 호로비츠를 대표하는 연주는 '호로비츠 인 모스코'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1986년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의 라이브 공연입니다. 이 실황은 TV로 중계되며 전 세계인들의 화제가 되었고, 동서 냉전의 화해 무드를 타고 만들어진 중요한 문화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스카를라티, 모차르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등이 연주된 이날의 음악회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여든셋 거장의 감동적인 피아노 소리에 눈물을 흘렸죠.

호로비츠는 마지막 순간까지 피아노를 떠나지 않았어요.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을 버리고 편안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건반을 두드린 말년의 기록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지나간 19세기의 피아노 기교, 추억, 낭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던 호로비츠에게 팬들이 선물한 별명이었습니다.


[직접 편곡한 카르멘·결혼행진곡… 지금도 피아니스트들 앙코르곡]

작곡에도 능력이 있었던 호로비츠는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화려하고 재미있는 편곡을 여럿 만들었어요. 그중 비제의 '카르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나,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 등의 피아노 편곡은 지금도 피아니스트들이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는 명곡입니다.

호로비츠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만난 러시아 출신의 대선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곡도 즐겨 연주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생전에 "호로비츠는 내 작품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라며 칭찬했는데요. 호로비츠는 이미 두 가지 버전이 나와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자유롭게 편집해 세 번째 버전을 내놓기도 했죠.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