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브렉시트 결사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애매한 태도로 참패

입력 : 2019.12.20 03:09

[英 노동당 총선 패배]

노동당, 84년 만에 최소 의석 차지… 제러미 코빈 당대표 책임론 불거져
'재투표로 다시 결정하자' 주장, 브렉시트 반대하는 48%의 표 놓쳐
주 4일제 도입, 무상의료 확대 등 극단적 좌파 공약 남발한 것도 패인

지난 12일 치러진 영국 총선은 보리스 존슨 총리와 보수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650석 중 절반을 훌쩍 넘는 365석을 차지했습니다. 제1 야당 노동당은 3분의 1도 안 되는 203석을 얻어 1935년 총선에서 154석을 얻은 이후 84년 만에 가장 적은 의석을 차지했어요. 노동당은 지난 10년 동안 4번의 총선에서 내리 보수당에 밀렸죠. 1900년 창당해 약 120년 된 유서 깊은 노동당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이는 과격한 좌파 정책을 내세워온 제러미 코빈(Corbyn·70) 현 노동당 대표의 책임입니다.

코빈은 영국인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독특한 대중 정치인입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영국 왕실에 적대적이고, 영국의 중요한 우방인 미국에 적대적이고, 영국인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영국 의료 시스템에 적대적입니다.

반면 보리스 존슨 총리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는 인물이지만 호감형입니다. 아무렇게나 매만진 듯한 헤어스타일, 너무 커 보이는 헐렁한 정장 차림의 존슨은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비주얼은 존슨이 단상에 올라 보여주는 유머 감각을 통해 더 큰 호감으로 이어집니다. 여왕에게도 깍듯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요.

분명 코빈은 대중연설에 능하고, 토론장에서도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을 요리하는 실력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존슨이 보여주는 유머와 생기가 없는 지루한 정치인입니다.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가 영국 총선이 치러진 지난 12일 런던의 한 투표소 밖에서 노동당 지지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당은 과격한 좌파 정책을 주장하면서 브렉시트 문제에는 어정쩡하게 대응한 코빈의 리더십으로 총선에서 참패합니다.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가 영국 총선이 치러진 지난 12일 런던의 한 투표소 밖에서 노동당 지지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당은 과격한 좌파 정책을 주장하면서 브렉시트 문제에는 어정쩡하게 대응한 코빈의 리더십으로 총선에서 참패합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코빈은 공약에서도 밀렸습니다. 이번 선거를 지켜본 한 영국인은 코빈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구시대적인 좌파 정책을 추진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코빈은 '주 4일제 도입' '법인세 19%에서 26%로 인상' '철도·우편·수도 국유화' '무상의료 확대' 등을 위해 매년 830억파운드(약 127조1000억원)의 천문학적인 세금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부터 드는 극단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코빈과 달리 중산층에게 어필하는 중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었죠.

또 코빈은 이번 선거를 치르며 엄청난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야당 지도자라면 당연히 해야 했을 '여당과 각 세우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든요. 바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사반대'입니다.

브렉시트는 지난 몇 년간 영국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 이슈였습니다. 존슨은 가장 열렬한 브렉시트 지지자입니다. 존슨 총리는 권투선수 차림을 하고 브렉시트라고 적혀 있는 장갑을 낀 채 스파링하는 모습을 공개하며 자신과 보수당의 입장을 알렸습니다. '브렉시트 완수(Get Brexit Done)'라고 적은 불도저를 몰아 벽을 돌파하는 '쇼'를 보여주기도 했어요.

2016년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인은 52%였습니다. 야당이라면 자연스럽게 '브렉시트 반대'를 외치며 나머지 48%의 유권자를 공략했어야 합니다. 반면 개인적으로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코빈은 당론으로 '브렉시트 반대'를 정하고 밀어붙이는 대신 '제2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 말자'가 아니라 '할지 말지 다시 정하자'가 노동당의 입장이 된 겁니다.

패착이었습니다.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사람은 '제2 국민투표'를 통해 혹시라도 브렉시트를 못하게 될 수 있으니 노동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사람은 투표를 다시 하더라도 브렉시트를 하자는 답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제2 국민투표'를 하자는 코빈을 지지해 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겁니다.

국가가 둘로 찢어진 이런 사안에서 노동당은 보수당과 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야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 등은 브렉시트 철회를 결사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제1 야당인 노동당은 뜨뜻미지근했어요. 노동당이 여당 보수당에 맞서 브렉시트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 코빈과 노동당은 재앙 같은 결과를 스스로 불러들인 겁니다.

게다가 당내 급진 좌파의 지지를 받는 코빈은 보수당 전반의 지지를 받는 존슨에 비해 큰 약점을 노출했습니다. 일부 노동당 지지자는 코빈이 '너무 좌파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며 코빈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붉은색이 상징인 노동당의 텃밭이라 '레드 월(Red Wall)'로 불리는 지역들 의석도 절반 이상이 보수당에 넘어갔어요. 레드 월은 영국 북동부의 탄광이 번성했던 지역으로 1980년대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가 석탄 산업을 구조조정한 이후 줄곧 노동당을 지지했던 곳입니다. 보수층 지지자를 끌어안은 존슨과, 노동당 지지자 중에서도 과격한 좌파에 호소했던 코빈이 보여준 차이죠.



앤드루 새먼·동아시아타임스 동북아 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