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부츠처럼 목 길면 '화', 단화처럼 생기면 '혜'라고 했죠

입력 : 2019.12.17 03:09

[우리 조상들의 신발]

양반은 가죽으로 만든 '화'와 '혜'… 서민은 짚신과 나막신 신었죠
조선시대 신발 짓는 장인 '화혜장', 중앙관청 '공조'에 소속되기도

최근 명품 브랜드들이 한 켤레에 100만원이 넘는 운동화를 내놓아 화제입니다. 한 켤레에 100만~200만원이라니 믿기지 않죠? 유명 연예인들이 신으면서 인기가 높아져 10~20대 일반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해요. 일부 한정 판매 운동화를 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한정판 운동화는 몇 배 이상 웃돈을 받고 되파는 게 가능해서 그렇다고 해요. 신발로 패션 감각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우리 조상의 신발 문화는 어땠을까요?

신발 목이 길면 '화', 목이 짧으면 '혜'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 등을 보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는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통일신라에서는 가죽신을 만드는 화전(靴典)과 탑전(鞜典), 미투리나 짚신을 만드는 마리전(麻履典) 등의 관청을 두어 왕실과 의례에 필요한 신발을 생산하기도 했어요.

본격적으로 신발 발전사를 볼 수 있는 것은 고려·조선시대부터입니다. 고려시대 이후로 신분과 성별에 따라 재료, 문양, 색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먼저 형태를 보면 목이 긴 신발과 목이 짧은 신발 두 가지로 크게 나뉩니다. 장화나 부츠처럼 목이 긴 신발은 화(靴), 고무신처럼 목이 짧은 신발은 혜(鞋)로 불렀어요. '화'는 사냥을 하며 말을 타던 북방 유목민들이 주로 신던 신이고, '혜'는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남방 지역 사람들이 신던 신이어서 우리나라의 지리나 기후 조건으로 두 계통의 신이 함께 존재하며 발달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어요.

①부츠와 닮은 조선시대의 ‘화(靴)’입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은 관복을 입을 때 이런 ‘화’를 신었어요. ②신발 목이 낮은 조선시대의 ‘혜(鞋)’입니다. 가죽 등으로 만든 상류층의 신발이었죠. ③삼국시대부터 평민 등이 즐겨 신은 짚신. ④조선시대 사대부가 즐겨 신었던 ‘태사혜’입니다. 조선 중기부터 양반층에 크게 유행했는데, 앞뒤로 장식된 문양을 ‘태사문’이라고 합니다.
①부츠와 닮은 조선시대의 ‘화(靴)’입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은 관복을 입을 때 이런 ‘화’를 신었어요. ②신발 목이 낮은 조선시대의 ‘혜(鞋)’입니다. 가죽 등으로 만든 상류층의 신발이었죠. ③삼국시대부터 평민 등이 즐겨 신은 짚신. ④조선시대 사대부가 즐겨 신었던 ‘태사혜’입니다. 조선 중기부터 양반층에 크게 유행했는데, 앞뒤로 장식된 문양을 ‘태사문’이라고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신발 재료는 앞서 말한 가죽과 짚뿐 아니라 비단이나 삼, 모시 같은 천이나 나무 등이 있었는데 가죽이나 비단을 이용해 만든 각종 '화'와 '혜'는 주로 상류층에서, 짚으로 엮어 짠 짚신이나 삼으로 만든 미투리, 나무로 만든 나막신 등은 주로 서민층에서 신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는 "고려의 신발은 무두질한 가죽으로 발에 맞추어 만들어 신었고, 묶지 않았다. 가난한 자는 소가죽, 부자들은 사슴 가죽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중기에 송나라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는 "짚신의 모양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남다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조선시대 양반들은 삼이나 왕골로 섬세하게 삼은 짚신을 주로 신었다고 합니다.

상류층이 즐겨 신었던 '혜'는 용도에 따라 디자인이 달랐다고 합니다. 나라의 관리들이 경축일이나 나라의 제사 때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든 흑피혜, 양반들이 평상시에 즐겨 신은 가죽신 태사혜, 여인들이 신던 신으로 가죽 몸체에 비단을 씌우고 앞코와 뒤에 당초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긴 당혜와 운혜 등이 대표적입니다.

신발 만드는 장인 '화혜장'

조선시대에는 '화'를 만드는 장인은 '화장(靴匠)', '혜'를 만드는 장인은 '혜장(鞋匠)', 이를 통틀어 '화혜장(靴鞋匠)'이라 불렀어요. 가죽을 다루어 신을 만든다 하여 순우리말로는 갖바치라고도 불렀지요.

화혜장은 국가 관청 소속으로 신발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중앙관청인 공조(工曹)에 화장 6명과 혜장 6명, 상의원(尙衣院)에 화장 10명과 혜장 8명이 소속됐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 '화' '혜'와 일반 백성들이 즐겨 신었던 짚신 등은 1920년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운동화와 구두 등에 밀려 지금은 거의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발로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 조선시대 갖바치에서 유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신은 옥견이가 발로 맨든 것이야." 신발 만듦새가 나쁘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요. 홍명희는 책에서 '이옥견이라는 가죽신 잘 짓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어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잘하는 것을 보면 옥견이의 신 솜씨 같다고 말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로 잘 못 만든 신발은 '옥견이가 손이 아니라 발로 만들었다'라고 한 것이죠.

이옥견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유몽인이 쓴 설화집 '어우야담'에 등장합니다. 민간 설화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요. 이 책에 따르면 이옥견의 할아버지는 세종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왕족이었지만,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가문이 몰락하자 이옥견은 가죽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신발 만듦새가 뛰어나 장안의 화제였답니다. 이후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게 밝혀지면서 당시 임금 성종이 왕족 신분을 인정해줬다고 해요. 이옥견은 왕족 신분을 인정받아 비단옷 입고 수레를 타고 조정을 드나들게 됐습니다. 이옥견은 길에서 나이 많은 갖바치를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큰절을 했다고 합니다. 과거 갖바치 시절을 잊지 않았다는거죠.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