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철심 박혀있는 낡은 대들보…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다

입력 : 2019.12.14 03:00

['영원한 현재'展]
급격한 발전·부작용 겪은 한국사회… 갈라지고 뜯긴 한옥 대들보에 비유, 상처 치료하듯 철심으로 박아 봉합
방향제 광고와 전쟁 폐허 사진 합성… 우리가 일상의 평화 누리는 동안 지구 반대편서 벌어진 전쟁 상기

2019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올해 여러분에게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세요. 여름방학 여행, 상 받은 날,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것,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어느 하루…. 생각만 해도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멋진 일도 있을 테지만,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하는 불쾌한 경험도 있을 거예요.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일들이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 가면 2019년에 생긴 사건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겠지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일이 언제 있었나' 하는 날도 옵니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시간이 당분간 멈춘다면,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고 싶은가요? 영원히 현재로 만들고 싶은 기억이 있을까요?

서울 종로 PKM갤러리에서 '영원한 현재'라는 제목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어요. 미술가 6명이 참여한 이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계속됩니다. 언뜻 생각하기엔, 영원히 현재로 끌어다 놓고 싶은 순간이라면 틀림없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그날일 것 같은데요. 정말로 그런지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사진1~5
①카데르 아티아, '영원한 현재', 2018, 한옥의 나무기둥. ②마사 로슬러, '아름다운 집: 집에 전쟁을 가져오다', 2004, 잉크젯 프린트. ③프란시스 알리스, '무제', 2011, 나무 패널 캔버스에 유채. ④구정아, '7개의 별', 2019, 캔버스에 야광 물감. ⑤이불, '보이지 않는 XXXII', 2019, 나무 패널 위에 자개와 아크릴 물감. /PKM 갤러리
작품1을 보세요. 이번 전시의 제목인 '영원한 현재'는 프랑스 출신 미술가 카데르 아티아(Attia·49)의 이 작품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나무 기둥은 2018년에 열린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 세워두었던 것인데, 한국 전통 가옥의 대들보로 만든 것이에요. 작가는 오래된 기둥의 갈라진 틈과 뜯겨 나간 곳에 스테이플처럼 철심을 박았어요. 마치 찢긴 살갗을 실로 봉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빠르게 발전했고, 긍정적 변화와 부정적 변화를 함께 겪었습니다. 한 예로 아파트가 구석구석 늘어서면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옛 한옥들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그 장소에 깃든 정든 추억들도 덩달아 사라져버렸지요. 과거는 현재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칩니다. 아티아는 한옥의 대들보에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 깃들어 있으리라 생각했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듯 대들보를 꿰매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기억에서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대들보에 '영원한 현재'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는 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작품2를 보세요. 미국의 마사 로슬러(Rosler·73)가 잡지 광고에 실린 사진을 오려붙여 제작한 후 인쇄한 이미지입니다. 환하게 웃는 광고 모델이 향긋한 실내용 가구 방향제를 뿌리고 있는데, 그 배경으로는 편안한 거실이 아니라 폭격을 맞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이 보이는군요. 안전한 집과 위험한 전쟁터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이미지를 한데 합쳐놓은 이미지랍니다. 로슬러는 우리가 사는 일상도 따져 보면 얼마나 이상스러운지 말해주고 있어요. 집에서 편히 쉬며 무심코 바라본 TV 뉴스에서는 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전쟁 소식이 날마다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작품3은 벨기에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란시스 알리스(Al s·60)가 만들었습니다. 두 이미지를 한 쌍으로 걸어놓았습니다. 하나는 TV의 화면조정용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본 장면을 그린 것이에요. TV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는 늘 벌어지고 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길에서 수박을 파는 사람을 그렸는데, 과일장수 앞쪽에 총이 놓여 있어요. 전쟁이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무기마저도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사실 과일장수와 총이라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인가요.

구정아(52) 작가 역시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주제로 다루었는데요(작품4). 야광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은 낮에는 흰 캔버스에 별들의 흔적만 겨우 보이다가, 밤에 불을 다 끄면 별들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에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림이라니, 모순적이네요.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서로 모순적인 것이 만나 부딪치는 상황이 특징인데요. 이불(55) 작가가 만든 작품5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연 재료 자개(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에 실리콘 등의 인공 재료를 의도적으로 섞어 만들었죠. 마치 우리도 이런 모순적인 조화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현재로 기억해야 할 순간들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상처와 모순을 남겨놓은 역사가 있다면, 이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잊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사진 오려서 다른 이미지에 붙여 새로운 의미 만드는 '포토몽타주']

마사 로슬러가 만든 작품2를 다시 볼까요. 이 작품은 포토몽타주(photomontage)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포토몽타주는 이미 인쇄되어 나온 사진 속 세부를 오려서 원래 사진과는 전혀 다른 배경 속에 붙이는 기법입니다.

포토몽타주는 캔버스 위에 색다른 질감의 재료를 잘라 붙이는 콜라주(collage)의 일종입니다. 다만 포토몽타주는 뭔가를 가져다 붙이면서 생겨나는 의미의 변화와 충돌을 강조합니다. 포토몽타주에서는 여러 사진의 의미가 각각 살아있거든요. 가령 광고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을 오려내서 다른 배경과 섞어 붙여놓으면 이미지끼리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가 생겨납니다. 똑같은 인물 또는 물건일지라도 다른 맥락에 놓이면 전혀 색다른 의미의 이미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