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장수왕이 세운 줄 알았는데… 광개토대왕 연호 발견됐죠

입력 : 2019.12.10 03:00

[충주 고구려비]
1979년 발견된 남진 정책의 증거… 5세기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해석
최근 비석서 '영락칠년' 글자 판독… 영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연호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북진 정책… 장수왕은 남진 정책" 통설 바뀔 수도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에서 새로운 글자를 판독했다는 뉴스가 있었어요. 비석 상단에서 '영락칠년(永樂七年)'이란 문구를 찾아냈다는 것이지요. '영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때의 연호로 서기 397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판독이 맞는다면 '한국 고대사의 상당 부분을 고쳐써야 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어요. 무슨 얘기일까요?

"고려대왕? 고구려 비석이다!"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는 '입석(立石)마을'이 있어요. 마을 이름처럼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입석', 즉 '서 있는 돌' 하나가 있었지요. '빨래판으로 썼다'는 소문이 나중에 돌았지만, 높이 2m가 넘는 이 큰 돌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면 그 아낙네는 '원더우먼'이었을 거예요.

충주고구려비는 그동안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친 증거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충주고구려비는 그동안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친 증거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충주까지 진출한 증거'라는 연구가 나오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충주시
"아! 글자가 보입니다. 이거 비석이에요." 1979년 2월, 충주 지역의 문화재 동호인 모임인 '예성동호회'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는 길에 '입석'을 보다가 빽빽하게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어요. 동호회 사람들은 학계에 이 사실을 알렸어요. 학자들은 "이것은 진흥왕순수비 같은 삼국시대의 옛 비석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끼를 걷어낸 석비를 정식으로 조사해 보니 뭔가 이상한 글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사자(使者)'…. "고구려 관직명이 여기서 왜 나오죠?"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성 이름인 '고모루성(古牟婁城)'이란 글자도 읽혔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글자가 판독됐지요. "고려대왕(高麗大王)… 이건 고구려 비석이에요!" 여기서 '고려'란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후반기의 국명이었어요. 충청도 남한강 유역에서 정말 뜻밖에도 고구려의 비석이 발견된 것이죠.

'원조 광개토대왕비'로 인정받을까?

광개토대왕의 진출 방향
당시 행정구역상 입석마을은 충북 중원군에 속했기 때문에 이 비석은 '중원 고구려비'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남한 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비인 이 비석은, 신라 영토였던 곳에 고구려군이 주둔했고 고구려가 종주국의 자격으로 신라 왕에게 의복을 하사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남하해 세력을 뻗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비석은 보통 고구려가 본격 남진(南進)한 5세기 장수왕이나 6세기 초 문자명왕 때 세워진 것으로 봐 왔어요. 하지만 '영락 7년', 즉 4세기 말 광개토대왕 때의 비석이라는 새로운 조사 결과가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주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때 세워졌지만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때 세워진 셈이라 원조 광개토대왕비가 되는 것이죠.

더 놀라운 일은 '삼국사기' 같은 기존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고대사의 새로운 세계가 이 비문에서 펼쳐진다는 점이에요. 서기 399년 백제·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해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남하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들어갔다는 것이 기존 학설이었어요. 그런데 이 비석이 397년 것이라면 이미 그 이전에 신라가 '고구려권(圈)'에 속했다는 얘기가 되죠.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했다가 철군했고, 실제로 남한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판도를 넓힌 사람은 장수왕이었다는 기존 통설도 바뀔 처지에 놓였습니다. 기존 기록에 따르면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397년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일으켜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했습니다. 남·북에서 동시에 군사작전을 할 힘이 당시 고구려에 있었다는 것이죠. 어쩌면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성한 나라였을지도 몰라요.


[중국 지안에는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비'라고도 하는 광개토대왕비〈사진〉는 옛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어요. 높이는 약 6.4m, 무게 37t으로 한국사의 비석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입니다. 네 면에 걸쳐 1770여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광개토대왕비
/남강호 기자
아들 장수왕(재위 412~491)이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생전 업적을 기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어요.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고구려 왕실의 계통(왕계·王系)과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대왕의 업적, 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에 관한 규정이 적혀 있어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