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평화 메시지·감동적 선율… 장벽 허문 베를린에 울려퍼졌죠

입력 : 2019.12.07 03:05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뉴욕 필 등 각국의 오케스트라 단원들 1989년 베를린에 모여 화합의 장 연출
'함께 손잡자'는 가사에 평화염원 담겨

나치즘 후유증으로 한동안 중단됐던 '바그너 음악제' 재개 당시에도 연주
임진각 '평화콘서트' 때도 감동 선사

12월이 되면 클래식 공연장마다 반드시 한 번은 공연되는 작품이 있죠. 바로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작품 125, '합창'입니다.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1악장, 강렬한 리듬과 풍자적인 느낌의 2악장, 천상의 아름다움이 서정적으로 펼쳐지는 3악장도 훌륭하지만,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베토벤이 곡을 붙인 4악장의 합창과 독창이 이 거대한 교향곡의 하이라이트죠.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형제이니 다 함께 손을 맞잡자'는 메시지가 베토벤의 악상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감동의 순간은 들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올 미래를 위한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음악으로 꼽힙니다.

1824년 초연된 이후 전 인류의 응원가가 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그래서인지 세계사의 중요한 페이지마다 이벤트처럼 연주되기도 했어요. 어떤 곳이었든 '환희의 송가'를 듣는 청중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제공했죠.

광복 66주년을 맞은 2011년 8월 15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바렌보임 평화콘서트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단상에 올라 지휘하고 있습니다. 이날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 청년 음악가로 구성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합창’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는 곡이거든요.
광복 66주년을 맞은 2011년 8월 15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바렌보임 평화콘서트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단상에 올라 지휘하고 있습니다. 이날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 청년 음악가로 구성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합창’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는 곡이거든요. /임진각=사진공동취재단

20세기 최고의 '합창' 교향곡 연주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연주가 바로 1951년 7월 29일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 개막 연주입니다. 바그너의 음악극만을 올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히틀러가 나치의 홍보 수단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이용한 데다가 당시 극장의 경영자였던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가 히틀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1943년 중단된 후 오랜 공백기를 가졌죠. 축제가 재개된 것은 1951년 여름이었는데요, 그 개막 공연에서 연주된 '합창' 교향곡의 실황 녹음은 지금도 최고의 연주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지휘자는 베토벤 해석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였습니다. 그 역시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오랫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기에 이날의 무대가 더욱 절실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네 명의 독창자가 함께한 연주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심신에 대한 위로와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에 대한 답을 들려주는 치열한 명연이었습니다.

30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특별한 '합창' 교향곡 공연이 있었어요. 그해 12월 25일 성탄절 동베를린 국립 가극장에서는 새롭게 찾아온 자유와 미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합창' 교향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날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아주 특별했어요. 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모인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 필, 영국의 런던 심포니, 소련의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 오케스트라, 독일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프랑스의 파리 오케스트라 등에서 온 연주자들은 연합 합창단의 목소리와 함께 화합의 장을 연출했어요. 지휘는 미국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이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요, 죽음을 약 10개월 앞두고 뜨거운 감성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마지막 불꽃을 사르는 멋진 연주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합창단은 실러의 가사를 살짝 바꿔 불렀습니다.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꾼 것이죠. 이날 '합창' 교향곡의 피날레는 그래서 '환희의 송가'가 아닌 '자유의 송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연주된 수많은 '합창' 교향곡 중 잊을 수 없는 연주를 꼽으라면 2011년 8월 15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끄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서동시집·西東詩集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겁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바렌보임이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종교와 정치의 분쟁 지역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 외 아랍의 젊은 음악가들을 모아 조직한 관현악단입니다. 그해 여름 바렌보임은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사이클 연주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8월 14일 서울에서 전곡 연주를 한 뒤, 15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합창'을 연주하는 특별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수많은 비난과 반대, 우려를 무릅쓰고 시작해 음악과 문화를 통한 화합, 그 안에서의 평화로운 공존을 꾀하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통일을 염원하는 장소에서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척 인상적이었죠. 야외무대에서 청중은 200년 전 베토벤이 그려낸 웅대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접하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고뇌를 벗어난 환희'라는 '합창' 교향곡의 주제는, 어쩌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인류의 이상이기에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공연장에서, 그리고 음원으로 접하는 '환희의 송가'가 여러분의 연말을 조금 더 행복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베토벤 10번 교향곡도 있지 않을까… 음악학자가 추적해 한 악장 재구성]

베토벤이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은 9번 '합창'입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곡을 계속했죠. 영국의 음악학자 배리 쿠퍼는 대조적인 두 곡의 교향곡을 동시에 작곡하던 베토벤의 습관을 떠올려 이른바 '10번 교향곡'을 구상한 흔적을 추적했습니다. 쿠퍼는 베토벤의 제자들이 남긴 기록 등을 참조하고 베토벤이 남긴 50여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10번 교향곡의 한 악장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재구성합니다. 이 곡은 1988년 10월 런던에서 발터 벨러가 지휘하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처음 무대에 오릅니다.

재구성한 작품의 분위기는 9번 교향곡과 대조적으로 온건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서정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악상이 많습니다. 하지만 쿠퍼가 짜맞춘 베토벤의 모티브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서 창작 후기의 원숙함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비평이 제기됐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