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환관 설치고 불교 믿네?'… 15세기 조선 선비 눈에 비친 中

입력 : 2019.11.26 03:00

[표해록(漂海錄)]
최부, 제주도서 육지 가다 14일 표류… 상하이 남쪽 도착해 귀국까지 6개월
조선 사람 발길 드물던 내지까지 방문… 유학자 입장에서 中 비판적으로 기록

국립광주박물관이 최근 조선시대 문신 최부(1454~1504)의 13세손으로부터 문집과 '표해록(漂海錄)'을 기증받았다고 해요. '표해록'은 15세기 중국 명나라의 사정을 담은 귀중한 기행문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최부는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됐던 걸까요?

풍랑, 표류, 기적의 생환

"나으리, 폭풍우입니다!" "꼭 붙잡게, 놓치면 끝장이야!"

1488년(성종 19년) 1월, 제주도에서 육지로 가던 배 한 척이 거센 비바람을 만나 표류하게 됐어요. 그 배에 탄 사람들은 한 해 전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에 임명돼 제주에 부임했던 최부와 수하 43명이었습니다.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 나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환관 설치고 불교 믿네?'… 15세기 조선 선비 눈에 비친 中
/그림=안병현
14일 동안 표류한 최부의 배는 두 차례 해적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육지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지금의 상하이 남쪽 저장(浙江)성인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이었어요. 왜구로 오인돼 몰살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간신히 조선 관리라는 사실을 인정받아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번화한 강남 지방과 산둥 반도를 거쳐 베이징에서 명나라 황제 효종을 알현하고 6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밟았지요. 무려 8000리 길이었다고 합니다. 돌아온 최부는 임금의 명을 받아 일주일 동안 견문기를 썼는데 그 책이 '표해록'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15세기 중국 사회의 모습'과 중국 관료들과 대화한 내용 등이 담겨 있지요. 일부 학자는 '표해록'을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견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기행문이라는 것이죠.

환관과 불교가 위세를 떨치던 중국

조선시대 중국으로 간 사신이나 상인은 대개 황제가 있는 베이징까지만 갔을 뿐, 그 남쪽 중국 내지로 발을 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최부의 기행문은 대단히 독특하고 귀중하다고 할 수 있고, 중국 사회·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 대한 최부의 시선은 상당히 비판적이었어요. 권세를 지닌 환관이 행차할 때 총포를 하늘에 쏘면서 소란을 피우는 걸 목격하기도 했는데, "조선 내관은 청소나 심부름을 할 뿐"이라며 어처구니없어했어요. 또 "우리나라에서는 불법(佛法·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했어요. 최부의 말을 뒤집어 보면 당시 중국에서 환관의 위세가 대단했고, 불교를 널리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달리 농업 못지않게 상업을 중시했고 상하 질서가 덜 엄격한 나라였다는 것도 최부의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답니다.

대륙에 떨친 조선의 선비 정신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던 30대 중반의 최부는 여정 내내 대단히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풍랑이 일어나자 사공들이 하늘에 기도하자고 할 때 최부는 '(유교적)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에 찬 물을 직접 퍼내거나 빗물을 받아 마시게 하는 등 리더십을 잃지 않았습니다.

중국 관원을 만나 이야기할 때도 유학자로서 해박한 고전(古典) 지식과 곧은 언행으로 그들을 감탄시켰지요. 내내 상복을 입고 중국을 다니던 최부는 명나라 예부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요구했으나 "효(孝)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당당히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 명나라 관리가 "고구려는 도대체 어떻게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라고 물었을 때 최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고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해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작은 나라가 100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선으로 겨우 돌아왔지만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목숨 잃어]

대나무처럼 꼿꼿한 조선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최부는 고국으로 돌아와 '표해록'을 쓴 뒤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던 중 모친마저 여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관직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배워 온 수차(水車)를 관개(농사를 짓기 위해 농경지에 물을 대는 것)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 간언하고 주위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1498) 때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6년 뒤 갑자사화(1504) 때 연산군의 명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