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성종 때 만든 '멸화군'이 조선 최초의 직업 소방관이죠
[조선의 소방 시스템]
조선 초기 한양에 화재 계속되자 세종, 화재 예방 위해 금화도감 설치
백성 교육하고 방화범도 잡았어요
잠잠하던 화재가 성종때 다시 기승… 24시간 대기하며 불끄는 멸화군 조직
◇세종 "불은 인재(人災)… 전담 기관 만들라"
세종 8년인 1426년,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큰 고민에 빠졌어요. 도성에 큰 화재가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하늘에서 내리는 재난이 있고, 인간이 저지르는 재난이 있다." '천재(天災)'와 '인재(人災)'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했던 세종은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인재는 사람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선왕조 들어서 새 수도가 된 한양(서울)에는 새로 지은 집이 많았는데, 옹기종기 붙어 있는 데다 짚과 나무가 흔해 한번 불이 나면 집 여러 채가 타는 경우가 잦았던가 봐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1417년 '금화령'을 내려 무척 엄한 화재 방지법을 세웠어요,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낸 사람은 곤장 40대, 이웃집까지 불태우면 곤장 50대, 종묘나 궁궐까지 불태운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도 세종 초기에는 다시 화재가 빈발해 큰 걱정거리로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신하들은 "무뢰배들이 농업에 힘쓰지 않고 일부러 남의 집에 불을 질러 도둑질을 하려는 술책"이라고 보고했어요. 세종은 한성부(지금의 서울시)에 금화도감을 설치해 화재를 막고 방화범을 색출하게 했습니다.
◇"불 끄는 것보다 예방이 최선"
하지만 이 관청은 불이 나면 즉시 소방관들이 출동해 불을 끄는 지금의 시스템과는 달랐습니다. 일단 화재가 발생하면 주변에 있던 모든 관원과 백성이 달라붙어 물을 길어오는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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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안병현
그럼 금화도감 관원들의 업무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로 백성을 대상으로 화재 예방 교육을 했고, 집과 집 사이에 담을 만들어 불이 이웃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도록 했답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인심이 무척 순박해 도심 집들조차 이웃 사이에 담장 같은 것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죠.
요즘도 화재 방지를 위해 불이 잘 붙는 소재를 피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답니다. 울타리나 담을 설치할 때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를 쓰게 했어요. 마을마다 사다리와 물을 퍼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서 불이 나면 신속하게 끌 수 있게 했지요. 우물이 드문 마을은 방화수를 저장하는 물독을 다섯 집마다 하나씩 두도록 했습니다. 화재 피해를 본 이재민에게 곡식과 살림살이를 내주는 활동도 담당했지요.
설치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금화도감은 '크게 할 일이 없어진 관청'이 됐어요. 철저한 화재 예방 덕에 더 이상 불이 나는 일이 없어졌던 거예요. 한양도성의 성문을 담당하는 성문도감과 합쳐 '수성금화도감'을 신설했다가 1460년(세조 6년) 폐지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불이 자주 나자 성종 때에 이르러 멸화군(滅火軍) 50명을 둬 24시간 대기 근무하며 불을 끄게 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문 소방관이라 할 만합니다. '소방(消防)'의 '소'는 불을 끈다는 뜻이고 '방'은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이에요. 금화군이 '방'을 담당했다면, 멸화군 때에 이르러 '소'까지 맡았다고 할 수 있죠. 소방업무의 시작은 '금화도감'이고 현대적 '소방관'의 등장은 멸화군인 거죠.
[금화도감·멸화군, 그다음에는?]
임진왜란 이후 병조와 한성부가 필요에 따라 소방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갑오개혁이 시행된 1894년엔 경무청이 화재 관련 업무를 맡도록 했지요.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는 소방서 50개가 설치됩니다. 소방 담당 행정기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0년대에는 내무부 치안본부 소방과였다가 1975년 민방위본부 소방국으로 승격됩니다. 2004년 독립청인 소방방재청으로 승격됐고, 2014년 국민안전처 산하 중앙소방본부가 됐다가 2017년 소방청으로 다시 독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