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시대 만백성의 꿈… '금강'이란 다이아몬드 뜻하죠
입력 : 2019.11.05 03:00
[금강산 유람]
과거엔 지체 높은 신분만 유람했지만 글·그림 통해 아름다운 경치 알려져 조선 후기 양민들도 금강산 유람
여자는 대문도 마음대로 못 나가던 때 14살 김금원은 남장하고 홀로 여행
지난달 23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금강산을 찾아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어요. 1998년 현대그룹이 북한과 계약을 맺고 엄청난 돈을 들여 건설한 것인데 이를 모두 해체하라는 겁니다. 지금은 북녘에 있는 금강산은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이 최고로 꼽아온 관광지죠. 북한은 그걸 볼모로 삼고 있고요.
◇국왕도, 중국 사신도 찾아가
1404년 가을, 조선 태종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다가 물었어요. "중국 사신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민간에서는 중국인의 소원이 '금강산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는데 사실인가?" 그러자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하륜은 "금강산이 동국(東國)에 있다는 말이 불경에 실려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동국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는 "해동에 보살이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이름하고…"라는 구절이 있고요.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문답이 오갔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금강산의 금강(金剛)은 금속 가운데 가장 굳고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말하죠. 불교에서 금강은 견고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를 뜻합니다. '고려사'에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 사신들이 금강산에 들러 불교 행사를 벌였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어요.
◇국왕도, 중국 사신도 찾아가
1404년 가을, 조선 태종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다가 물었어요. "중국 사신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민간에서는 중국인의 소원이 '금강산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는데 사실인가?" 그러자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하륜은 "금강산이 동국(東國)에 있다는 말이 불경에 실려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동국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는 "해동에 보살이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이름하고…"라는 구절이 있고요.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문답이 오갔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금강산의 금강(金剛)은 금속 가운데 가장 굳고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말하죠. 불교에서 금강은 견고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를 뜻합니다. '고려사'에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 사신들이 금강산에 들러 불교 행사를 벌였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어요.
- ▲ /그림=안병현
◇글 짓고, 그림 그려 칭송
고려 말 신진사대부 이곡이 금강산을 다녀와서 '동유기(東遊記)'라는 기행문을 쓴 것으로 시작해, 여러 문인과 화가가 금강산을 보고 느낀 감동을 전했습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활동한 사대부 권근은 "금강산은 아름다움이 뛰어나 그 이름이 천하에 퍼진 것"이라고 말했어요. 하륜도 "풍악(楓嶽·단풍이 든 가을의 금강산)은 진실로 기이하고 뛰어나서 사랑할 만하다"고 평했죠.
김시습, 이이, 정철 등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고, 수많은 문인이 금강산 기행문을 지었어요. 진경산수화로 이름난 정선을 비롯해 김홍도, 최북 등 조선 후기 일류 화가들도 금강산을 그렸습니다. 금강산에 대한 시·서·화 작품들 덕분에 조선 후기에는 선비들 사이에는 물론 일반에서도 금강산 유람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글과 그림으로 남긴 여행 체험은 형편이 어려워 금강산 유람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쉬움을 달래는 데 도움을 줬을 겁니다.
◇남장하고 금강산 유람한 조선 여성도
금강산 유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일생의 소원이었나 봅니다. 조선 정조 임금 때 제주도에서 상인으로 큰돈을 벌어 가난한 백성을 도와준 여성 김만덕이라는 분이 있어요. 정조가 그녀를 기특히 여겨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하자 김만덕은 "금강산을 여행하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금강산을 찾게 됩니다.
조선 후기 여자들은 대문 밖을 맘대로 나가기도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조선 순조 때 김금원이라는 여인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남장하고 홀로 금강산을 돌아보고 글을 남깁니다.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남자 옷을 입은 채 여행했다고 합니다.
[지체 높은 관리는 등산할 때도 의자처럼 생긴 가마 탄 채였죠]
과거에 지체 높은 관리나 중국 사신 등은 걸어서 '등산'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산에 오를 때도 가마를 탄 채였어요. '남여(藍輿)'라 부르는 의자처럼 생긴 가마를 이용했습니다. 좁은 산길에서 앞뒤로 두 사람이 메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작은 가마입니다. 덮개나 벽이 없는 구조라 산세를 편하게 감상하기도 좋았죠. 금강산에 있는 절들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신이나 관료를 위한 짐꾼과 가마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각 사찰의 가마꾼은 정해진 경계까지 사람을 나르는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