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익숙한 팝송 '올 바이 마이셀프', 라흐마니노프 선율 따와

입력 : 2019.11.02 03:03

[대중음악 속 클래식]

루이스 터커의 '미드나이트 블루', 베토벤 '비창' 따와 성악으로 노래
우리나라 가요 중에는 신화의 T.O.P, 후렴구에 '백조의 호수' 선율 흘러

좋은 음악이라면 그 종류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있죠. 들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음악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은 음악입니다. 취향에 따라 클래식 같은 순수음악보다 대중음악을 더 친숙하고 가깝게 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좋은 음악은 시대와 장르를 따지지 않고 계속 그 생명력을 지니고 있죠. 유명한 팝송이나 가요 같은 대중음악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명곡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노래가 많습니다.

베토벤의 작품이 대중음악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가장 첫 번째 예는 1982년에 발표된 노래 '미드나이트 블루(Midnight Blue)'를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영국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스 터커가 찰리 스카벡과 함께 부른 이 노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의 2악장 멜로디를 따왔습니다. 이 곡은 영국 싱글 차트와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랐고, 우리나라에도 알려졌죠. 루이스 터커는 오페라 가수로 교육받은 경력이 있어 대중음악인 이 노래를 성악 발성으로 노래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노래 중에는 휘성이 2007년 발표한 '사랑은 맛있다'가 베토벤 비창 멜로디를 따와 만들어졌습니다. 경쾌한 리듬에 소울풀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큰 인기를 끌었죠. 반주와 가수의 노래 멜로디가 모두 비창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랩도 나오는데, '비창'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휘성의 랩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대중음악 속 클래식 그래픽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남자 아이돌 그룹 '신화'는 활동 초기에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사용했어요. 1999년 발표한 'T.O.P(Twinkling of Paradise)'가 바로 그 곡인데요, 이 노래의 후렴에서 등장하는 멜로디는 유명한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중 백조의 주제입니다. 이 곡은 인기 절정의 그룹 방탄소년단도 무대에서 공연하며 다시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누가 들어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클래식 작품을 쓴 작곡가로는 역시 라흐마니노프를 꼽아야 할 것 같아요. 그의 작품도 여러 곡이 대중음악계에서 쓰이는데요,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미국 클리블랜드 출신의 가수 에릭 카먼(Carmen·70)입니다. 카먼은 197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을 사용해요. '네버 고너 폴 인 러브 어게인(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이란 제목의 노래는 후렴에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아다지오선율을 인용합니다. 현악 합주로 연주되는 원곡의 같은 부분을 록 보컬리스트의 창법으로 멋지게 바꿔 성공을 거두었죠. 이 노래는 발표 직후부터 인기를 끌었는데요, 이후에도 여러 가수가 이 노래를 재해석해서 부르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에릭 카먼의 최대 히트곡은 바로 같은 앨범에 수록된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죠. 이 노래도 라흐마니노프 멜로디를 따왔어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곡부터가 짙은 서정성과 멜로디의 친숙함으로 영화 음악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많이 쓰이는 명곡이지만, 여전히 높은 인기는 발표되자마자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까지 오른 '올 바이 마이셀프'의 역할도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 노래 역시 후배 음악가들이 여러 번 리메이크했는데요, 그중에 캐나다 출신의 여성 가수 셀린 디옹의 노래가 가장 유명합니다. 디옹의 노래도 크게 히트를 기록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4위를 차지했죠.

에릭 카먼은 강력하고 묵직한 사운드의 록 그룹에서 활동하다 발라드풍의 솔로 노래를 발표하는 변신을 이뤄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그의 성공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주옥같은 멜로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카먼이 클래식 작품에서 힌트를 찾은 이유는 어린 시절 익혔던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를 포함한 클래식 음악의 기억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흐마니노프처럼 카먼의 집안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 출신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공통점이죠.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 곁에서는 계속 클래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팝송이나 가요들에 클래식 선율이 녹아 있으니까요. 걸작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 영감에 감동한 후대의 음악가들이 이 예술작품들에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또 다른 얼굴로 재탄생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흐뭇합니다.

[클래식 명곡에 가사 붙이면 성악곡으로 재탄생하죠]

클래식 명곡으로 사랑받는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처음 들어도 멜로디가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듣는 이의 귀에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들리는 선율은 완만한 진행을 보여 누구든 콧노래로 흥얼거리기 좋은 ‘성악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악기로 연주하는 작품이라도 가사를 붙여 노래하면 성악곡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1996년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발표한 앨범 ‘패션’은 클래식의 명선율에 가사를 붙여 진짜 성악곡처럼 노래한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쇼팽의 연습곡 작품 10의 3,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등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익숙한 멜로디에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카레라스의 음성이 더해지니 마치 예전부터 노래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을 감상하는 듯 자연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