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터키 눈치 보는 미·러·EU… 쿠르드족 침공해도 수수방관

입력 : 2019.10.25 03:09

[터키·쿠르드 갈등]

터키 대통령, 시리아서 미군 철수하자 국경 지역 쿠르드족 민병대 공격
EU는 난민 방출한다는 터키 위협에 美는 터키의 NATO 잔류 원해서
러는 터키의 軍협조 원해 제재 못해

터키가 지난 9일부터 시리아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 민병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터키와 맞닿은 시리아 북부 국경 480㎞, 폭 32㎞의 시리아 영토를 '안전지대'로 설정했어요. 터키에 들어온 시리아 난민을 이곳에 이주시키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자국 영토를 확대한 셈이죠. 외교 전문 매체 포린폴리시는 "터키가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어요.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는 미국과 함께 최전선에서 극단주의 무장 세력인 이슬람국가(IS) 격퇴전을 수행했죠. 그렇지만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 민병대를 자국 내 분리주의 세력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분파로 보고 테러리스트로 취급해왔습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터키 남부 국경과 맞닿은 시리아 북부를 침공해 쿠르드 민병대를 제거하기로 하고, 지금 같은 성과를 거뒀죠.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 정부는 물론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EU)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터키의 이익을 챙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왜 국제사회는 터키의 시리아 침공을 저지하지 못했을까요? 에르도안이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외교를 통해 운신의 폭을 넓혔기 때문입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지난 10일 발언하는 모습입니다. 에르도안은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터키의 지정학적 가치를 적극 활용해 미국, 러시아, EU의 개입을 막는 외교 능력을 보였어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지난 10일 발언하는 모습입니다. 에르도안은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터키의 지정학적 가치를 적극 활용해 미국, 러시아, EU의 개입을 막는 외교 능력을 보였어요. /AFP 연합뉴스
EU는 터키가 시리아를 침공해 쿠르드족을 공격하자 분노했어요. 그렇지만 EU는 쿠르드족을 지지하는 '말치레', 회의장에서 테이블을 쾅 내리치는 '보여주기' 이상은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EU는 터키가 필요하거든요.

2014년부터 본격화한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 민간인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습니다. 터키는 이 중 대다수인 360만명을 받아들였어요. 난민 대부분은 사실 터키보다 더 안전하고, 나랏돈도 많고, 난민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EU 국가로 가고 싶어 합니다. EU도 이런 난민이 실제 몰려올까 걱정하고 있죠. 터키는 지리적으로 시리아와 EU 국가 사이에 있어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어요. 터키는 EU가 시리아 침공을 비판하자 "난민 360만명을 EU 국가로 보내겠다"고 압박했죠. 이는 EU가 감당할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터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고 있어요. 터키가 미국이 주도하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하길 원하는 러시아의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서죠. 사실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터키 사이가 좋지는 않았어요.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제정러시아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을 지원하며 오스만제국과 싸우도록 했죠. 2차 대전 이후로 터키는 NATO 회원국으로 소련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했어요. 그렇지만 최근 터키가 러시아제 지대공미사일인 S-400을 도입할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진전됐어요. NATO 회원국인 터키가 미국의 분노를 감수하면서까지 러시아 방공 시스템을 도입한 겁니다.

러시아는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터키가 필요합니다. 러시아 해군 대부분은 흑해에 갇혀 있습니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져나가는 길은 단 하나, 터키의 보스포루스해협을 지나가는 것뿐이죠. 흑해라는 '유리병 안에 갇혀 있는 신세'를 면하려면 터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터키 지도

마지막으로 미국이 남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IS와의 싸움에서 훌륭한 동맹군이었던 쿠르드족의 운명을 터키 손에 넘겨버리자 미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맹비난했어요. 그렇지만 미국과 터키의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쿠르드족의 운명보다 터키를 NATO 회원국으로 붙잡아두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에르도안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데, 미국이 나서서 터키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 분야에서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웁니다. 국제 무대에서 '고립주의'를 펼치는 그는 지난 21일 "석유만 지키면 된다"며 시리아 북부에 남아 있던 미군을 이라크로 철수시켰죠. 에르도안의 시리아 진출에 제대로 맞설 리더는 아니죠.

이런 상황에서 시리아는 아무 힘이 없어요. 시리아 정부군은 최근까지 벌어진 내전으로 전력 소모가 극심합니다. 터키 정규군을 상대할 전력이 없죠. 쿠르드 민병대가 믿던 미국은 등을 돌렸어요.

미국, 러시아, EU 모두 각자의 이익을 위해 터키와 협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터키가 시리아 영토에 마음대로 들어가 쿠르드족을 공격하면서도 국제사회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한 까닭은 자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최대한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죠.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