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2차 세계대전 전장을 누비던 사진가들… 전후 그들의 렌즈에 비친 '낭만의 도시'

입력 : 2019.10.12 03:05

['매그넘 인 파리'展]

전쟁의 궁핍함 벗어나 되살아난 패션·관광 도시의 모습 포착
학생·노동자가 기존 질서에 항거한 68혁명의 순간도 생생히 담아냈죠
전쟁 보도사진 찍던 사진가들이 결성한 단체 '매그넘'의 작품 400점

작품1 - 에리히 레싱, ‘1960년, 개최 실패한 미소 정상회담의 취재 현장’, 1960.
작품1 - 에리히 레싱, ‘1960년, 개최 실패한 미소 정상회담의 취재 현장’, 1960. /예술의전당·한가람디자인미술관·ⓒMagnum Photos

전쟁이 터지면 군인들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생생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위험 천지인 전쟁터를 뛰어다니는 종군기자들도 있지요. 보도사진은 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기록하고 전달력 있게 찍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진들과 구별됩니다.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던 2차 세계대전 당시 보도 사진을 찍던 사진가들이 전쟁이 끝나고 1947년 '매그넘(Magnu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어요. 창립자 중에는 종군기자였던 로버트 카파(Capa·1913~1954)도 끼어있었습니다. 매그넘의 신념은 사진이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진실한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Benjamin)은 1931년에 쓴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만약 진리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마도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빛과 같을 것이라고 쓴 적 있어요. 찰나를 기록하는 사진 속에 진리가 들어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매그넘 회원들도 찰나의 진리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사진을 찍기 전에 그럴듯한 장면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어요. 사진을 찍은 후에도 이미지를 자르거나 지우는 편집 작업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했고요.

내년 2월 9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매그넘 인 파리' 전시에서는 매그넘 소속 사진가들이 찍은 프랑스 파리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소개됩니다. 매그넘 회원 40명의 작품 400여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지요.

작품1을 보세요. 별로 견고해 보이지도 않는 사다리 위에 건장한 남자 6명이 각자 카메라 뷰파인더를 눈에 들이대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어요. 회담장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입니다.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고, 어쩌다 놓쳐버린 장면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 장의 결정적인 사진을 얻기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숨죽이며 기다립니다. 이 6명의 기자가 찍은 사진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네요. 한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찍는다 해도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는 않아요.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누구를 빼고 누구를 크게 넣을지도 선택해야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 순간이 좋을지도 선택해야 하니까요. 사진은 카메라가 찍지만, 무얼 보여줄지 선택하는 것은 늘 사진가의 몫이랍니다.

작품2 - 브뤼노 바르베, ‘리퍼블리크에서 당페르-로슈로로 향하는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 1968.
작품2 - 브뤼노 바르베, ‘리퍼블리크에서 당페르-로슈로로 향하는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 1968. /예술의전당·한가람디자인미술관·ⓒMagnum Photos
작품2에서는 신호등 위에 올라가 오른팔을 번쩍 든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네요. 이 사진은 1968년 5월에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기존의 사회질서에 항거하며 일으켰던 68혁명의 한순간을 포착했어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기념하는 탑이 저 멀리 보입니다. 그 탑 위에 오른손에 횃불을 든 자유의 수호신 동상이 서 있는 모습도 어렴풋하게 보이네요. 마치 자유의 수호신이 청년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기도 합니다. 사진가가 선택한 단 한 장면은 열 마디로 설명해야 할 말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3 - 로버트 카파, ‘뉴룩 스타일 롱스커트를 입고 있는 디올 모델’, 1948.
작품3 - 로버트 카파, ‘뉴룩 스타일 롱스커트를 입고 있는 디올 모델’, 1948. /예술의전당·한가람디자인미술관·ⓒMagnum Photos
작품3을 보세요. 1948년 로버트 카파가 찍은 이 사진 속에는 검은색 개와 함께 경쾌하게 광장을 걸어가는 여성 모델이 등장합니다. 종군기자 생활 중 찍은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전 세계에 알렸던 카파는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하는 파리 모습도 사진으로 담아냈어요. 파리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점령됐었죠. 궁핍한 생활을 하던 당시 파리 여성들에게 멋을 내고 거리를 활보하기는 어려웠어요. 칙칙한 생활복만 입고 지내던 여인들이 이제는 보란 듯이 허리가 잘록하고 치마가 풍성한 새로운 유행의 옷을 입었어요. 멋쟁이들의 도시, 파리가 되살아났음을 한 컷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작품4 - 로버트 카파, ‘개선문’, 1952.
작품4 - 로버트 카파, ‘개선문’, 1952. /예술의전당·한가람디자인미술관·ⓒMagnum Photos

1952년에 찍은 작품4에서도 카파는 평범한 사진 한 장으로 프랑스가 다시 우뚝 일어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파리를 상징하는 기념물 중 하나인 개선문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가운데로 거대한 프랑스의 삼색 깃발이 휘날리는 사진인데요. 개선문의 아치 아래로는 외국인을 대표하는 듯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한 남자와 노부인이 지나갑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두 사람처럼 파리에 여행 온 외국인 관광객들 때문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파리가 매혹적인 관광지로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은 것이죠.

[순간 속 진실을 포착하는 사진가들]

'매그넘(Magnum)'은 1947년 4월 미국 뉴욕에서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카르티에 브레송, 조지 로저 등에 의해 설립된 사진가 단체예요. '매그넘'은 크다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목표로 창립됐습니다. 창립자들은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이 본 것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보도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진가들이에요.

매그넘은 기존 회원들이 심사해서 신규 회원을 받아요. 한번 정식 회원이 되면 평생 그 지위를 유지합니다. 아직 매그넘에 가입한 한국인 사진가는 없습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