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바이러스 변형 빨라 백신개발 지연… 돼지, 걸리면 죽는다

입력 : 2019.10.10 03:00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세대 거듭하며 변이되고 180개 단백질 만들어 개발 과정 복잡
수입 돼지고기·가공육 통해 퍼져 현재 중국·베트남 등 20개국서 기승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아

지난달 17일 국내 상륙이 처음 확인된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 Swine Fever·ASF) 때문에 방역 당국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연천, 파주, 김포, 강화 등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확산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첫 감염 경로도, 이후 국내 전파 경로에 대해서도 거의 밝혀진 것이 없어요. 최근에는 연천 지역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멧돼지도 ASF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SF 확산을 막기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죠. 중국은 작년 8월 ASF가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돼지의 절반 정도를 도살 처분했지만 전염을 막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20여 일 만에 돼지 수십만 마리를 죽여야 했습니다.

ASF는 1921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1957년 유럽에, 2018년 아시아에 상륙했어요. ASF는 전 세계로 번지면서 최근에는 10일 이내에 감염된 돼지 95%가 사망할 정도로 독성이 강해졌어요. 게다가 전파력도 강해요. ASF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말린 고기에서 300일, 냉동 상태에서 1000일까지도 살아남습니다. 더구나 ASF는 백신이 아직도 없지요.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면역 반응과 백신의 원리

먼저 '백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간단한 설명을 드릴게요. 인간이든 동물이든 몸속에는 외부의 병원체에 저항하는 면역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면역 시스템은 한번 침입했던 적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침입했을 때 빠르게 방어를 해냅니다. 백신은 이 면역 시스템을 이용합니다. 미리 독성을 낮춘 병원체를 접종해 실제로 병원체에 노출되었을 때 이겨내도록 하는 원리죠.

[재미있는 과학] 바이러스 변형 빨라 백신개발 지연… 돼지, 걸리면 죽는다
/그래픽=안병현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몸 안에 있는 'B 면역 세포'는 병원체를 탐지하면 'T 면역 세포'에게 연락합니다. T 면역 세포는 병원체를 포식 세포가 먹도록 표시해주는 '항체'와 '기억 세포'를 만듭니다. 항체는 당장 병원체 없애는 걸 돕습니다. 기억 세포는 나중에 같은 병원체가 들어오면 항체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죠.

백신은 죽인 병원체나 불활성화한 바이러스의 DNA를 사용해서 백신으로 쓰기도 하고, 살아 있지만 독성을 줄인 세균을 백신으로 쓰기도 합니다. 요즘은 병원체의 DNA 조각이나 병원체가 만들어낸 단백질 조각 등을 활용해서 백신을 만드는 등 더 고도화된 방법을 씁니다.

이런 방법으로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파상풍 등 다양한 질병에 대한 백신이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ASF는 왜 백신이 없을까

지금은 백신을 만드는 방법과 작동 원리가 밝혀져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기술적으로는 대부분의 경우에 백신 개발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ASF에 대한 백신이 없는 이유는 뭘까요.

먼저 ASF 바이러스는 DNA 이중나선 구조를 가지고 있고 크기도 큽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ASF 바이러스는 180가지가 넘는 단백질을 만들 수 있는데, 이 단백질 중 어떤 것이 ASF를 일으키는지가 아직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각각의 단백질의 성질을 모두 연구해야 문제를 일으키는 단백질을 알 수 있고, 이에 대응하는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어요. 그렇다 보니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더딥니다. 감염된 돼지가 대부분 빨리 죽는 것도 연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죠. 또 바이러스는 세대 간 변이가 큰데, 만드는 단백질까지 많다 보니 ASF의 특징적인 항원을 만들고, 그것을 인식해서 항체를 만들도록 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겁니다.

하지만 백신을 만드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은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ASF가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고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이남 국가를 제외하면 크게 번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신 개발 필요성이 적은 편이었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의학적인 연구는 긴급한 문제들에 집중적으로 투자가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진다면 ASF 백신도 곧 나올 수 있을 테니 '이제 삼겹살은 평생 못 먹겠구나'라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야생 멧돼지에겐 가벼운 감기… 농장 돼지들에겐 치명적 질환]

ASF 바이러스는 1921년 첫 발견 이래 무서운 속도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1957년 포르투갈, 1971년 쿠바, 2007년 조지아와 러시아, 작년 중국, 올해 베트남과 한반도로 퍼지며 현재 20개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어요.

ASF 바이러스는 아프리카 멧돼지들한테는 대단한 병이 아니었어요. 이름처럼 감기 같은 병이었는데 1957년 포르투갈에 상륙하면서부터 치사율 100%를 기록하는 강력한 병으로 돌변합니다. 연구자들은 야생 멧돼지가 아닌 유럽과 아시아의 사육용으로 길러진 돼지들이 특히 이 바이러스에 취약하다고 보고 있어요.

치사율이 이렇게 높으면 보통은 병을 옮길 돼지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전염병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ASF 바이러스는 돼지고기, 가공육 등을 통해서도 퍼집니다. 서정향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중국, 북한 등은 수입 돼지고기와 수입 돼지고기 가공육을 통해 ASF 바이러스가 전파됐다"고 했어요.

ASF 바이러스에 비교적 저항이 강한 야생 멧돼지가 바이러스를 옮기기도 합니다. 러시아, 폴란드, 에스토니아는 야생 멧돼지에 의해 ASF 바이러스가 퍼졌습니다.


주일우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