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쓸모없어 보이던 투구게 피 연구, 세균과 전쟁서 무기됐죠
[투구게]
백혈구가 세균을 먹는 사람과 달리 대장균·콜레라균 만나면 혈액 굳어
빠르고 정밀한 세균 검사 가능해져
보잘것 없어 보였지만 사회 공헌한 연구에 주는 황금거위상 수상했어요
지난달 미국과학진흥회(AAAS)와 미 의회는 2019년 '황금거위상' 수상작을 발표했어요. 2012년부터 매년 '정부 예산 지원을 받은 연구 중에서 처음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인류와 사회에 크게 이바지한 연구' 세 가지씩에 상을 주고 있죠. 때로는 예산 낭비처럼 보일 수 있는 기초과학 연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올해 수상작 중 하나가 '투구게의 혈액순환 연구'였습니다.
◇내독소 만나면 굳는 투구게의 피
투구게는 고생대에 번성했던 삼엽충에서 진화한 생물로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려요. 4억5000만년 전 중생대에 번성했죠. 우리나라에선 생김새가 투구를 닮았다고 해서 '투구게'라고 부르죠. 생물학적으로 '게'는 아니고 거미와 더 가까운 친척 관계라고 하지만요.
1950년대 존스홉킨스대 프레데릭 뱅 박사는 사람과 달리 푸른 피가 흐르는 투구게의 혈액순환을 연구했어요. 피 색깔은 보통 혈액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은 헤모글로빈, 투구게는 헤모시아닌이 이 역할을 해요. 헤모글로빈에는 산소를 만나면 붉은색을 띠는 철 원자가, 헤모시아닌에는 파란색을 띠는 구리 원자가 있어 피 색깔이 다르죠.
- ▲ /그래픽=안병현
뱅 박사는 투구게 같은 절지동물의 면역 체계를 연구하며 투구게 피를 살피고 있었어요. 이들은 사람과 달리 백혈구가 없는데, 어떻게 외부 세균에 저항하는지를 연구했죠. 그는 투구게의 혈액에 세균이 침투하면 겔(gel) 상태로 응고되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뱅 박사는 UC 샌프란시스코대 잭 레빈 교수와 함께 계속 이 현상을 탐구한 결과 투구게의 피가 대장균·살모넬라균·콜레라균 같은 '그람음성균'을 만났을 때 응고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런 세균들은 체내에 다른 생물에 해를 주는 독소(내독소)를 갖고 있는데 세포벽이 손상되면 이 성분이 밖으로 나와 염증 등을 일으킵니다.
투구게는 이런 내독소를 '변형세포'를 통해 제거했어요. 내독소를 만나면 변형세포 안의 큰 알갱이가 터지면서 응고 단백질이 나와 내독소와 엉겨 붙어요. 해로운 물질이 더 퍼지지 못하게 일단 응고시키고 그다음 제거하는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죠.
◇약품·물이 오염됐는지 확인하는 데 활용
내독소는 세균이 죽거나 번식할 때 생깁니다. 문제는 물이나 약품에 세균이 번식하면 내독소의 온상이 된다는 겁니다. 특히 물은 수액이나 약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입니다. 물이 오염됐는지 아닌지를 살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어요. 특히 이런 내독소들은 물을 끓이는 정도로는 제거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투구게 연구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내독소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과 비슷한 면역 체계를 가진 토끼를 주로 활용했어요. 오염이 의심되는 물을 토끼에게 주사하고 며칠 동안 상태를 보며 열이 오르는지 관찰했죠. 이 검사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수많은 토끼와 사육 공간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죠.
그런데 투구게 혈액을 쓰면 이 검사가 훨씬 간단해집니다. 투구게 혈액과 세균에 오염됐다고 의심되는 물이나 약물을 섞습니다. 투구게 피가 응고되면 독성이 있는 것이고, 피가 응고되지 않으면 괜찮다는 뜻이니까요. 토끼를 쓸 때와 달리 길어도 2시간이면 결과가 나왔고요. 또 토끼와 달리 투구게 피로 검사하면 응고 정도에 따라서 내독소의 독성이 얼마나 심한지도 알 수 있었어요. 투구게 혈액의 특성과 그 원리에 대한 뱅과 레빈의 기초 연구 덕분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죠.
이 방법은 'LAL(투구게 변형세포 용해물) 검사'라고 불립니다. 미 FDA는 이런 투구게 혈액을 활용한 검사법을 1977년 승인했어요. 인간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투구게 혈액 면역 작용은 의약품 제조 및 품질 관리 차원에서 꼭 필요한 내독소 확인 분야에서 '신기술'이 돼 수많은 사람 목숨을 구한 겁니다. 토끼 목숨도 살렸고요.
[10년 뒤 투구게 30% 사라질 것]
투구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닮았어요. 내독소 검사에 활용되기 전에도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도왔거든요.
과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투구게를 찐 뒤 갈아서 농사지을 때 비료로 썼어요. 원주민들은 이 농법을 유럽인들에게도 알려줬어요. 19세기에는 매년 100만 마리 이상의 투구게가 논밭에 비료로 뿌려졌죠. 20세기 들어 화학비료가 본격적으로 생산된 후에야 투구게는 비료 신세를 벗어났죠.
투구게는 장어나 소라를 잡을 때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중국 등에선 투구게 알을 별미로 먹기도 하고요.
투구게는 이제 '피'까지 주고 있죠. 알을 낳기 위해 해안가로 다가오는 투구게를 산 채로 잡아 약 30%의 피를 뽑고 돌려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최대 20%의 투구게가 죽는다고 해요. 또 풀어준 투구게도 불임이 되는 개체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만 한 해 43만 마리의 투구게 피를 채취하고 있다고 해요.
이로 인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투구게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영국 가디언은 "10년 뒤 북미의 투구게 수가 지금의 70%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