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英연방국가서 열광하는 대회, 아시아선 일본만 본선 진출

입력 : 2019.09.27 03:09

[럭비 월드컵]

1987년 처음 시작돼 4년마다 열려… 일부 국가선 월드컵·올림픽만큼 인기
일본, 럭비월드컵 아시아 최초 개최… 한국은 예선 탈락해 본선 진출 실패
1995년 남아공서 개최된 럭비월드컵, 인종 뛰어넘은 화합의 선례로 남았죠

지난 2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소셜미디어에 일본이 주최하는 럭비 월드컵 개최 축하 영상을 올렸다가 '태풍 피해를 무시하고 국제 행사 홍보에만 신경 쓴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체 럭비월드컵이 뭐기에 아베 총리는 이렇게까지 홍보에 나섰던 걸까요?

이날은 럭비 월드컵이 일본에서 아시아 최초로 개막한 날이었습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럭비 월드컵은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과 올림픽에 버금가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입니다. 일본 대 러시아전을 시작으로 11월 2일까지 일본 12개 경기장에서 모두 48경기가 펼쳐지죠. 잉글랜드·프랑스·남아공·아르헨티나 등 20개 팀이 본선에 출전했어요.

럭비 월드컵은 1987년 처음 시작했어요.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지만 인기는 상당합니다. 2015년 영국에서 열렸던 럭비 월드컵은 누적 시청자가 42억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주최 측은 "월드컵과 올림픽을 제외하면 가장 인기 있는 대회"라고 주장하죠. 일본은 50만명이 넘는 외국 럭비 팬이 찾아오면서 4372억엔(약 4조8000억원)의 경제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지난 22일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럭비월드컵 경기에서 공을 든 아일랜드 선수가 스코틀랜드 선수의 태클을 피해 달리고 있습니다. 럭비는 전진 패스가 불가능해 공을 들고 달리는 것이 주 공격 수단입니다.
지난 22일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럭비월드컵 경기에서 공을 든 아일랜드 선수가 스코틀랜드 선수의 태클을 피해 달리고 있습니다. 럭비는 전진 패스가 불가능해 공을 들고 달리는 것이 주 공격 수단입니다. /AFP 연합뉴스
럭비 월드컵 우승 트로피는 '웹 엘리스 컵'이라 부릅니다. 학교 축구 경기 중에 규정을 어기고 공을 손으로 집어 들고 골대로 뛰어들면서 '럭비'를 발명한 영국 소년 윌리엄 웹 엘리스의 이름에서 따왔죠. 그가 다닌 사립학교 이름이 '럭비(Rugby) 스쿨'이어서 종목 이름도 럭비가 됐다고 하고요. 웹 엘리스 컵을 가장 많이 차지한 나라는 뉴질랜드(3회)입니다. 호주와 남아공도 두 번씩 우승한 럭비 강국입니다.

럭비는 간단히 말해 15명이 한 팀을 이뤄 상대 진영을 돌파해 골 지점까지 달려가는 경기입니다. 골 지점에 공을 찍어서 득점에 성공하는 걸 '트라이'라고 부르지요. 축구나 미식축구와 달리 공을 앞으로 패스하지 못해요. 자기보다 뒤에 있는 선수에게만 패스가 가능하죠. 그래서 공을 손에 들고 전진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전략입니다. 뿌리가 된 축구나 전진 패스가 허용되는 미식축구보다 '질주 본능'이 훨씬 잘 나타나는 스포츠죠. 공을 가진 선수는 잡거나 밀거나 태클을 해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접촉이 허용되기 때문에 축구보다 훨씬 거칠고 힘과 덩치가 중요한 운동입니다. 격렬함이 매력 포인트죠. 사실 공을 발로 차면서 드리블해도 되긴 하는데 타원형 공이라 쉽지 않아요.

축구와 럭비는 모두 영국에서 만들어졌죠. 영국에서 럭비는 상류층 스포츠고 축구는 서민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어요. 명문 사립학교에서 럭비를 즐길 때 서민들이 다니는 공립학교에서는 축구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래서인지 럭비 팬들은 유쾌하고 점잖은 편입니다. 영국의 악명 높은 축구 팬 '훌리건'들이 경기가 벌어지면 난동을 부리는 것과 비교되죠.

그렇지만 럭비는 축구처럼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어요. 전통적인 럭비 강국인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53개국)에서는 절대적인 인기지만, 아시아 지역에서는 큰 관심이 없어요. 20개국이 참가하는 이번 대회 본선에 진출한 아시아 팀은 일본 국가대표팀뿐입니다. 한국은 예선에서 탈락했죠.

흔히 스포츠가 국가·정치·인종·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하죠. 흑인과 백인의 인종차별 정책이 반세기 동안 이어지면서 나라가 극심한 분열에 빠졌던 남아공에서 열린 1995년 럭비 월드컵은 이 말이 현실이라는 걸 보여줬어요. 남아공은 상류층인 백인은 럭비를, 차별받던 흑인은 축구를 즐겼던 나라였습니다. 넬슨 만델라(1918~2013) 남아공 대통령은 남아공 럭비 국가대표팀이 영국과 경기할 때 남아공 흑인들이 모두 영국을 응원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남아공 럭비팀은 모두 백인이라 흑인들은 응원할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개최했던 1995년 럭비 월드컵을 흑인과 백인이 '남아공'이라는 이름 아래 뭉칠 기회로 삼아요. '백인'의 상징인 럭비 국가대표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만델라 본인도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서 응원했죠. TV로 경기를 보던 남아공 흑인은 백인 위주의 국가대표팀을 응원했고, 경기장에 몰려든 남아공 백인 럭비 팬들은 과거 '흑인 테러리스트'라고 폄하했던 만델라의 이름을 연호했습니다. 약체로 평가받던 남아공 럭비팀은 기적적으로 우승컵을 거머쥡니다. 흑인 대통령 만델라가 백인 럭비팀 주장에게 웹 엘리스 컵을 건네는 장면은 남아공의 흑백 화합을 상징했죠.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포츠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그 힘은 정부보다도 강하다."

이번 럭비 월드컵에는 한국 출신 구지원(25) 선수가 일본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경기에 나서고 있어요. 그는 2017년부터 일본 국가대표팀에서 뛰고 있습니다. 구지원을 보면서 한국 사람이 일본 팀을 응원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 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