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9세기 반출된 파르테논 신전 조각, 영국이 단돈 6억에 샀죠

입력 : 2019.09.18 03:09

[엘긴 마블]

그리스가 오스만제국 지배하에 있을 때 英 엘긴 백작이 오스만제국 허락 구하고
파르테논 신전 조각 40% 뜯어내 반출… 그리스 "불법 반출이니 환수하라" 주장
英 "오스만이 허가해 적법하다"며 거부, 최근 그리스 정부가 장기 대여 방식 제안

지난 6일 그리스 정부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을 빌려와 2021년 아테네에 전시하고 싶다고 공식 요청했어요. 이에 앞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영국이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장기 대여 방식으로 그리스에 돌려주면, 그리스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값진 예술품을 대영박물관이 전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밝혔어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되찾는 건 미초타키스 총리 혼자만의 꿈이 아닙니다. 지난 4월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그리스 대통령도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은 런던이 아닌 아테네에 있어야 한다면서, 그리스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돌려받기 위해 "성전(聖戰)을 치르고 있다"고 했어요. 무슨 사연일까요?

오스만제국 지배 당시 반출된 대리석상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고, 신전 외벽 처마 밑에163m 길이의 대리석 조각을 둘렀어요. 사실적 묘사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특징적인 2500년 전의 서양 미술 걸작입니다. 또 신전에 무수히 많은 조각상을 세웠죠. 그런데 이곳에 있던 대리석 조각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에 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799년 영국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1766~1841)가 오스만제국에 영국 대사로 부임합니다. 엘긴 백작은 엘긴 지방의 영주를 뜻해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왼쪽 끝) 조각 등이 있는 ‘엘긴 마블’입니다.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죠. 영국 엘긴 백작은 1800년대 초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던 대리석 조각 약 40%를 영국으로 반출합니다. 영국과 그리스는 이 ‘엘긴 마블’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왼쪽 끝) 조각 등이 있는 ‘엘긴 마블’입니다.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죠. 영국 엘긴 백작은 1800년대 초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던 대리석 조각 약 40%를 영국으로 반출합니다. 영국과 그리스는 이 ‘엘긴 마블’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자신의 저택을 그리스 신전처럼 꾸미고 싶어 했어요. 그는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에 접근해 파르테논 신전 접근권을 따냈습니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허가를 받아 1801~1812년 사이 전체 파르테논 신전 조각의 40%를 뜯어내 영국으로 가져갑니다. 이 조각들은 엘긴 백작이 가져온 대리석상이라는 뜻에서 훗날 '엘긴 마블'이라 불리게 되죠.

이후 엘긴 백작은 이혼 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가져온 조각을 영국 정부에3만5000파운드(현재 가치 약 6억원)를 받고 팔았어요. 엘긴 마블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게 된 사연입니다.

적법한 반출이라는 영국

그리스는 1821년부터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여 1832년 독립합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하죠.

'엘긴 마블' 논란도 이때부터 본격화됩니다. 1983년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 문화부 장관은 "식민지 시대에 그리스의 뜻과 상관없이 빼앗겼다"며 공식적으로 환수 요청을 합니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엘긴 마블’은 신전 석조 처마 아래 등에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엘긴 마블’은 신전 석조 처마 아래 등에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영국은 '합법적으로 얻은 유물'이라며 그리스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하죠. 엘긴 백작은 영국 정부에 엘긴 마블을 넘기면서 오스만제국이 발급한 허가장을 제출했어요.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을 일부 떼어 영국으로 가져가도 좋다'는 내용이죠. 영국 의회는 이 허가장을 근거로 엘긴 마블을 사들였어요. 그러니 영국 소유라는 게 영국의 주장입니다.

불법 반출이라는 그리스

그리스는 이 허가장 자체를 문제 삼고 있어요. 오스만제국이 발급했다는 원본이 없고, 영어로 번역한 사본만 남아 있어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죠. 그리스는 이를 근거로 '영국은 조각의 원주인 그리스인과 그리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조각상을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미초타키스 현 그리스 총리는 무조건적 반환을 요구하던 과거 정부와 달리 장기 대여 형식이라는 타협안을 내놨죠. 그렇지만 지금도 대영박물관은 '엘긴 마블이 영국 소유라고 먼저 인정해야만, 대여도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양국이 시각 차이를 줄일 수 있을까요?

[유네스코 '문화재 불법반출 방지법', 엘긴 마블·직지에 효력 발휘 못해]

유네스코는 문화재 불법 거래를 막고 환수를 촉진하기 위해 1970년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을 맺습니다. 줄여서 ‘1970년 협약’이라고 부르죠. 타국에서 불법적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취득을 금지하는 내용이에요. 134개국이 이 협약에 가입하고 준수하고 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엘긴 마블’이나 우리나라 ‘직지심체요절’ 같은 문화재에 이 협약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970년 맺은 협약이기 때문에 이보다 앞서 불법 반출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