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두번이나 허물고 다시 지었지만… 일제가 철거한 '비운의 문'

입력 : 2019.09.17 03:09

[돈의문(서대문)]

조선 태종 때 풍수상 안 좋다며 폐쇄, 세종 때는 통행 방해한다며 허물고
지금의 신문로에 세번째로 지었지만 1915년 일제가 전차궤도 만들며 철거
104년 만에 AR(증강현실)로 복원

서울 서쪽 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이 일제가 철거한 지 104년 만에 최근 '디지털 복원'이 됐어요. '돈의문 AR' 애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에 내려받은 뒤 돈의문박물관마을 근처에서 휴대전화로 비추면 복원된 돈의문의 (가상)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돈의문'은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부르던 문으로 서울 '서대문구(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등으로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숭례문(남대문)이나 흥인지문(동대문)과 달리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아 원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답니다. 서대문은 짓고 허물기를 각각 세 차례씩 반복했던 비운의 문이었습니다.

"지맥이 끊어진다" 첫 번째 철거

"이 고갯길은 경복궁의 팔과 같은 곳입니다. 길을 열지 말아야 지맥(풍수지리에서 땅속의 정기가 순환한다는 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3년) 풍수가 최양선이 임금에게 지금 돈의문이 있는 자리가 지맥을 끊고 있으니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어요. 1396년(태조 5년) 한양 도성의 다른 일곱 개 문과 함께 준공된 멀쩡한 문을 폐쇄하라는 말이었죠.

지금 같으면 황당한 얘기겠지만, 풍수지리설을 상당히 존중했던 당시는 달랐습니다. 태종은 건의를 받아들여 당초 지금의 사직동 고개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첫 번째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운 서대문 격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웠습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안병현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희한한 일도 생겼어요. 처음 서전문을 세우려 했던 장소가 하필이면 태종의 최측근인 권신 이숙번의 집 앞이었던 거예요. 자기 집 앞에 서대문이 세워질 거란 소식을 들은 이숙번은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던지 "우리 집 말고 인덕궁(仁德宮) 앞 옛길이 적당하다"고 주장했어요. 인덕궁은 조선 2대 임금이자 태종의 형님인 상왕(上王) 정종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실록'은 '조정에서 이숙번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했어요. 전(前) 임금보다 현재 권력을 가진 신하가 더 위세가 셌던 것이죠. 두 번째 서대문인 서전문은 지금의 경희궁 근처 언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행이 불편하다" 두 번째 철거

하지만 서전문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세종 4년(1422)에 통행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서전문을 헐고 오늘날 신문로 부근에 새로 문을 세우고 다시 돈의문이라고 이름을 붙였거든요. 이번에 디지털로 복원된 것도 바로 이 세 번째 문이에요.

'옛 문'인 첫 번째 돈의문이나 서전문과 구별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 문을 '새문'이라고 불렀어요. 얼마 전 '새문안교회' 새 건물이 완공돼 화제가 됐는데, 여기서 '새문안'이 바로 세종 때 두 번째 돈의문을 지으면서 생긴 지명입니다. 새문 안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죠.

"복선 전찻길 방해돼" 세 번째 철거

이 두 차례의 철거는 어디까지나 옛 문을 헐고 새 문을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1915년 일제가 돈의문을 철거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일제는 서울의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을 모두 헐려고 했어요. 그러다 '동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지나간 기념물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서대문만 철거했어요. 돈의문의 석재를 주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답니다.

한때 서울시가 돈의문의 '실물 복원'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교통난 해소 방법을 마련하지 못해 사실상 중지된 상태랍니다.

[옛 서대문역은 3·1운동 집결지]

1915년 일제가 서대문(돈의문)을 철거한 뒤에도 ‘서대문’이라는 지명은 계속 남아 있었어요. 1900년 세워져 1919년까지 존재했던 ‘서대문역’이 그 한 예입니다. 지금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경찰청에서 큰길 건너편에 있었는데, 경부선과 경인선의 시발·종착역이었습니다. 1919년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지금의 서울역 역할을 한 것이죠. 3·1운동 때 시위를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인파가 집결한 곳도 서대문역이었어요. 현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지점입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