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은 곰돌이 '푸', 95년 전 영국에서 탄생

입력 : 2019.09.07 03:03

['안녕, 푸'展]

1924년 출판된 잡지 속 삽화들… 당시 드물던 천진한 상상 담긴 동화
어린이에 대한 따뜻한 시선 엿보이죠

‘푸와 크리스토퍼 로빈’
작품1 - ‘푸와 크리스토퍼 로빈’. /소마미술관·ⓒThe Shepard Trust

이솝우화 같은 옛날이야기에는 여우와 두루미, 개와 까마귀 같은 동물들이 등장해 사람처럼 말을 하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거나 침대에서 잠을 자지요. 인간적인 습성을 가진 동물 이미지는 어린이 책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19세기에 이르러 풍부해져요. 특히 영국은 전통적으로 글에 그림을 곁들이는 삽화(illustration)가 강한 나라여서, 동화뿐 아니라 가족들이 읽는 주말 신문이나 잡지에도 삽화가 큰 비중을 차지했어요. 1840년대에 처음 나온 영국의 시사 잡지 '펀치(Punch)'가 한 예입니다.

삽화의 전통이 튼튼한 덕분에 영국은 그림책 분야에서도 단연 앞서 나가게 됐어요. 랜돌프 콜더컷(Caldecott)이나 월터 크레인(Crane), 비어트릭스 포터(Potter) 같은 뛰어난 그림책 작가들이 알고 보면 19세기에 활약했던 영국인이랍니다.

영국 삽화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Shepard·1879~1976)예요. '펀치'의 인기 삽화가였던 셰퍼드는 1924년에 소년과 곰이 나오는 이야기의 삽화를 담당하게 됐어요. 디즈니보다 40여 년 앞선 원조 '푸'의 이미지가 바로 그의 손에서 탄생합니다.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셰퍼드가 그린 원화를 소개하는 '안녕, 푸'전이 열리고 있어요. 런던에서 시작된 세계 순회 전시로, 서울 전시를 끝으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내년 1월 5일까지예요.

푸 이야기를 쓴 작가는 앨런 알렉산더 밀른(Milne·1882~1956)이에요. 밀른의 글은 셰퍼드의 사랑스러운 그림과 완벽하게 어우러졌고, 두 사람이 창조한 '곰돌이 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셰퍼드는 처음엔 흑백 삽화를 그렸지만, 삽화를 책으로 펴내면서 색을 칠한 그림으로 출판했어요.

푸 이야기와 그림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밀른과 셰퍼드가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세심히 관찰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일 거예요. 작품1에서 장화를 벗는 소년의 동작을 보세요. 간결하게 그렸지만 실제로 아이가 했음 직한 동작입니다.

작품2 - ‘곰돌이 푸, 피글렛, 크리스토퍼 로빈이 나뭇가지로 놀다’
작품2 - ‘곰돌이 푸, 피글렛, 크리스토퍼 로빈이 나뭇가지로 놀다’. /소마미술관·ⓒThe Shepard Trust

작품2는 크리스토퍼와 친구들이 숲에 있는 조그만 다리 난간에 기대 개울이 흘러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장면인데요. 가끔 이들은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서 어디까지 멀리 가는지 구경하기도 합니다. 주인공 소년이 제일 잘하는 일은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에요.

작품3 - ‘곰돌이 푸와 100에이커 숲의 캐릭터들’
작품3 - ‘곰돌이 푸와 100에이커 숲의 캐릭터들’. /소마미술관·ⓒThe Shepard Trust

작품3을 볼까요? 곰돌이 푸와 더불어 당나귀, 아기 돼지, 캥거루, 호랑이, 그리고 부엉이가 보입니다. 각각 이름이 있고 개성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크리스토퍼에게 이 친구들은 하나하나가 아주 특별하다는 걸 말해주지요.

크리스토퍼는 작가 밀른의 아들 이름이고, 푸는 크리스토퍼가 가장 좋아하던 커다란 곰 인형의 이름이에요. 밀른은 아들이 인형과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숲에서 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어요.

작품4 - ‘100에이커 숲 지도’
작품4 - ‘100에이커 숲 지도’. /소마미술관·ⓒThe Shepard Trust
작품4의 지도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인 '100에이커 숲'을 그린 것인데, 실제로 밀른이 자란 곳이라고 해요. 푸의 이야기는 어른이 된 작가가 아들의 모습을 통해 지난 추억을 돌아보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답니다.
작품5 - ‘푸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고 그의 옆으로 10개의 꿀병이’
작품5 - ‘푸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고 그의 옆으로 10개의 꿀병이’. /소마미술관·ⓒThe Shepard Trust

작품5는 꿀단지를 늘어놓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푸의 모습입니다. 푸는 달콤한 꿀을 너무나 좋아해서, 꿀만 먹으면 금세 행복해져요. 하지만 아껴 먹지 못하는 게 흠이라고 할까요. 꿀단지 10개 중 4개를 첫째 날 하루 만에 먹어치우더니 결국 나흘째 되는 날에는 마지막 한 통 남은 것을 보며 아쉬워하지요.

100년 전 영국에는 어린이 책의 종류는 많았지만, 정말로 어린이다운 상상이 담긴 책은 아직 별로 없었습니다. 어린이에게 바람직한 생활 습관을 들이게 하려는 훈계의 의도가 담긴 내용이나, 권선징악의 교훈이 담긴 글이 다수였죠. 하지만 이 동화는 어린이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은 담지 않았어요. 꿀을 모으기 위해 일하는 내용도 없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걸 잘하는 소년과 단것을 참지 못하는 뚱뚱한 곰이 주인공이니까요.

밀른과 셰퍼드는 곰돌이 푸를 쓰고 그리는 동안 작가와 삽화가로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멋진 아빠로 변하기도 했을 거예요. 곰돌이 푸는 누구보다 그 두 아빠에게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40년 뒤 빨간 셔츠 입고 나타난 푸]

밀른이 쓴 푸 이야기는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 소개됐어요.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최고의 어린이 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두루 인기를 끌었죠.

월트 디즈니사(社)도 푸의 인기를 눈여겨보고 1961년 캐릭터 저작권을 사들였어요. 이후 1966년부터 푸를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내놓습니다. 빨간 셔츠를 입힌 디자인이 특징이죠. 푸는 세계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디즈니 캐릭터 중 하나가 됐어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