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가야연맹 대표'까지 올랐지만 외교만 앞세우다 멸망

입력 : 2019.09.03 03:00

[아라가야]
백제·신라가 가야까지 세력 뻗치자 서기 529년 동아시아 국제회담 개최… 대화를 통해 난세 극복하려 했어요
군사력 부족해 2년 후 백제에 흡수… 561년 신라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죠

경남 함안 가야리 유적이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아라가야의 임금이 살던 왕성(王城)으로 추정되는 곳이지요. 아라가야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요?

◇굴착기가 찾아낸 '아라가야 성벽'

"멈추세요! 거길 더 이상 파면 안 됩니다!"

작년 4월 11일 함안군청 문화재 담당인 조신규 학예사 등 공무원 3명은 인근 봉산산성을 조사하고 돌아오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있었어요.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언덕에 이르자 굴착기가 산비탈을 깎고 있었는데, 잘라낸 절개 면에서 좌우로 길게 이어진 검은 띠 같은 것이 보였어요. 깜짝 놀란 조 학예사는 황급히 달려가 작업을 중지시켰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가야연맹 대표'까지 올랐지만 외교만 앞세우다 멸망
/그림=안병현
왜 그랬을까요? 옛 사람들은 흙으로 성을 쌓을 때 땅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나뭇가지를 태운 목탄을 이용하곤 했어요. 바로 이 목탄 층(層)의 일부가 그 '검은 띠'의 정체였던 거예요. 땅 주인이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산비탈을 파던 중 뜻밖에도 아라가야의 성벽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죠.

◇대규모 건물터와 무덤의 별자리

뒤이은 발굴 조사 결과, 토성과 울타리 시설, 대규모 건물터 14동이 확인됐어요. 건물터 안에서는 쇠화살촉,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이 출토됐고요. 언제 만들어진 건물이었을까요? 서기 5~6세기, 바로 문헌에 등장하는 아라가야의 전성기와 일치했어요.

지난해 12월에는 근처에 있는 사적 515호 '함안 말이산 13호분'에서 또 놀라운 발견이 있었어요. 아라가야 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덮개돌에서 125개의 구멍이 확인된 거예요. 바로 별자리를 새긴 성혈(星穴)이었어요. 죽어서도 무덤 덮개에 새긴 우주를 바라보려 했던 군주가 묻혀 있는 것이죠.

◇외교력 발휘해 돌파구 모색했지만…

여러 나라의 연맹으로 이뤄졌던 가야는 처음엔 금관가야(김해)가 중심이었지만 5세기 중·후반부터는 대가야(고령)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라가야에서 서기 529년 '동아시아 국제회담'이 개최됐다는 거예요. 백제·신라·왜의 사신이 한곳에 모인 '안라(아라) 고당회의'였습니다.

당시 일종의 연맹체였던 가야의 안보 상황은 다급했습니다. 금관가야가 신라의 침입을 받았고 백제의 성왕은 섬진강 하류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라가야 왕은 신라와 백제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이 두 나라 사신들과 신라를 배후에서 견제할 수 있는 왜의 사신을 한데 모았어요. 외교력을 발휘해 험난한 국제 관계에서 가야가 살 길을 찾으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어요. 장군이 포함된 백제 사신 3명은 막상 회담장인 고당(높은 건물)에 도착하자 주최 측의 제지로 올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신라는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아라가야는 이 회담을 통해 '가야 연맹국의 새로운 대표'임을 선언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습니다. '일본서기'는 당시 "가야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를 형(兄)·부(父)로 삼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당회의를 통해 일약 한반도의 '강소국'으로 떠올랐던 것이죠. 사람들은 가야리 왕성에서 나온 건물터 중 하나가 바로 이 '고당'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531년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던 아라가야는 백제의 세력권으로 흡수됩니다. 이후 백제를 이긴 신라에 의해 561년 아예 멸망하고요. 아라가야는 내실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외교력에 기대 난국을 타개하려다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죠.


[대가야는 호남으로도 진출]

많은 사람이 가야는 낙동강 일대에 있던 고대국가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 가야 관련 유적이 전북 지역에서도 발굴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서기 2세기 무렵 금관가야가 이끄는 연맹체가 낙동강 주변과 서부 영남 지역에 자리 잡고 '전기(前期) 가야'를 이뤘어요. 이후 5세기 초 고구려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낙동강 동쪽은 신라에 흡수됐어요. 5세기 중·후반 '후기(後期) 가야'의 새 중심 세력으로 떠오른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진안·장수·임실·남원 등 호남 동쪽으로 진출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