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몰아치듯 빠른 연주곡… 청중에겐 희열, 연주자에겐 도전

입력 : 2019.08.31 03:03

[무궁동(無窮動)]

'왕벌의 비행'이 무궁동 작품 중 유명…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곡이죠
파가니니의 '무궁동'은 바이올린곡, 1초에 10개 이상의 음 연주해야 하죠
슈만의 곡은 속도보다 지구력이 중요… 손가락 넓게 벌려 화음 연주하기 때문

청중이 바라보는 연주자의 모습 중 가장 신기한 것이 빠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많은 음표를 연주해 내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때로는 손놀림이 너무 빨라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죠. 지난주 KBS 교향악단과 협연한 첼리스트 니콜라스 알트슈테트는 기교가 매우 뛰어난 연주자로 알려졌어요.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작곡한 '유머레스크'는 빠른 음표들을 쉴 새 없이 연주해야 하는 어려운 곡인데, 알트슈테트는 작곡가 자신도 약 2분 걸려 연주한 이 곡을 1분 46초에 연주하는 기록을 세웠죠. 1초에 11개 정도의 음을 연주한 셈이네요.

클래식 작품에는 이렇게 연주 내내 쉬지 않고 빠른 음을 연주하도록 쓰인 곡이 많아요. 듣는 이들에게는 재미있고 흥분되는 순간을 제공하지만 연주자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숙제를 안기죠.

이런 곡들을 라틴어로는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 우리말로는 '무궁동(無窮動)' 또는 '상동곡(常動曲)'이라고 합니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움직임'이란 뜻이에요. 밖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고도 영원히 일을 계속하는 가상의 기관인 '영구기관(永久機關)'도 페르페투움 모빌레라고 부릅니다. 영구기관은 흔히 SF 소설에 나오는 소재인데, 음악에서도 같은 표현을 써서 마치 영구기관처럼 음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곡을 일컬어요.
라틴어로는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 우리말로는 ‘무궁동(無窮動)’은 쉬지 않고 빠른 음을 계속해서 연주해야 하는 곡을 부르는 말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움직임’이란 뜻이죠. 1초에 음 10개 이상을 연주해야 하는 곡도 있어요. 사진은 피아니스트 손놀림을 특수 촬영해 잔상이 남게 했습니다.
라틴어로는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 우리말로는 ‘무궁동(無窮動)’은 쉬지 않고 빠른 음을 계속해서 연주해야 하는 곡을 부르는 말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움직임’이란 뜻이죠. 1초에 음 10개 이상을 연주해야 하는 곡도 있어요. 사진은 피아니스트 손놀림을 특수 촬영해 잔상이 남게 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름 자체가 '무궁동'인 작품이 여럿인데요. 특히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의 곡이 유명합니다. 이탈리아 제노바 태생의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기교가 너무나 뛰어나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작품 11 '무궁동(이탈리아어·Moto Perpetuo)'은 약 4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음표 2500여개를 연주해야 하는 어려운 곡입니다. 어림셈을 해보면 1초에 10개 이상의 음을 연주해야 합니다.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의 기본인 왼손의 운지법(손가락 쓰기)과 오른손 활의 지속적이고 일정한 움직임을 훈련하는 연습곡으로도 자주 쓰여요.

피아노 곡에서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의 피아노 소나타 1번 작품 24 중 4악장이 '무궁동'으로 꼽힙니다. 프레스토(매우 빠르게)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는 이 곡은 원래 소나타의 한 악장이지만, 다른 악장에 비해 월등하게 인기가 높아 따로 떼어 내 연주하기도 하지요.

오페라 '마탄(魔彈)의 사수(射手)'를 남긴 베버는 오페라 작곡가인 동시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어요. 베버는 모두 네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는데, 가장 유명한 곡이 말씀드린 소나타 1번 작품 24 중 4악장입니다. 주로 오른손이 멜로디를 맡고 왼손은 반주의 역할을 하는데, 오른손이 쉬지 않고 빠른 음표를 연주해야 하기에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의 시험곡이나 콩쿠르에서 자주 들을 수 있어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작품 11 ‘무궁동(Moto Perpetuo)’ 악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작품 11 ‘무궁동(Moto Perpetuo)’ 악보. /IMSLP 캡처

연주자의 손가락 빠르기보다 지구력을 테스트하는 피아노곡도 있죠.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토카타' 작품 7이 바로 그런 곡입니다. 복잡하고 손을 많이 벌려야 하는 화음을 양손으로 연달아 눌러야 해요. 특히 곡의 중간 부분은 옥타브를 연속으로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는 손목 힘과 탄력, 근육의 이완 능력이 동시에 필요해요.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죠. 슈만은 피아노 연습 도중 손을 다쳐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는데, 자신이 만든 이 곡 때문에 부상이 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랍니다.

뭐니 뭐니 해도 '무궁동'으로 분류되는 클래식 곡 중 제일 인기가 많은 곡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 작곡의 '왕벌의 비행'입니다. 원래는 오페라 '술탄 황제의 이야기' 2막 1장에서 등장하는 간주곡으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이죠. 2분 남짓 되는 이 곡은 반음계로 움직이는 빠른 음표들이 마치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는데, 벌 떼가 백조를 공격하는 장면을 다양한 악기를 통해 다채로운 음색으로 실감 나게 나타내고 있어요.

어느 악기로 연주하든 잘 어울리는 이 곡은 여러 가지 편곡으로 더 친숙하죠. 피아노는 물론이고, 현악기와 관악기, 마림바 같은 타악기의 연주로도 '왕벌의 비행'을 감상할 수 있어요. 인간의 목소리로 연주한 편곡으로 보컬리스트 보비 맥퍼린과 첼리스트 요요 마가 연주한 앨범도 큰 인기를 끌었죠. 라흐마니노프, 조르주 치프라, 마크 앙드레 아믈랭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저마다 개성을 살려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는데, 모두 기교적으로 매우 어려워요. '왕벌의 비행'은 무대에서 앙코르곡으로도 자주 등장해요. 피아니스트 유자 왕, 임현정 등은 이 곡을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연주해 청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가장 큰 매력은 넘치는 에너지]

무궁동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매력은 에너지 넘치는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20세기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만년에 자신의 음악을 특징짓는 다섯 가지 요소로 고전적 요소, 혁신적 화성, 서정적 요소, 그로테스크함과 함께 동적(動的)인 성격을 꼽았어요. 스스로 슈만의 ‘토카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프로코피예프는 특히 피아노곡에서 강한 운동성을 지닌 무궁동 작품들을 만들었고, 이 작품들은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악마적 암시’라는 제목의 작품 4의 4, 토카타 작품 11 등이 대표적이죠. 캅카스 지방의 민속 리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7번의 3악장은 한 마디에 일곱 박자를 연주해야 하는 독특한 리듬을 3분여 동안 지속시켜야 하는 특별한 무궁동입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