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24년 동안 63회 성묘 간 정조… 능행길은 민심 듣는 창구

입력 : 2019.08.27 03:09

[성묘]

가야 수로왕부터 시작된 추석 성묘
조선시대에는 한식과 추석이 되면 양반·머슴 할 것 없이 성묘하러 떠나
임금도 1년에 2~5회 선왕 무덤 행차… 백성들과 접촉하며 민심을 살폈죠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3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주말이면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하러 가는 인파가 늘고 있어요. 벌초는 성묘(省墓)하기 전에 조상의 묘에 자란 잡초를 베고 묘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말해요. 봄 명절인 한식이나 가을 명절인 추석 성묘 이전에 많이 합니다.

성묘는 조상의 묘를 찾아가 무덤이 허물어지거나 잡초가 무성하지는 않은가 살피고 그곳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며 조상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 문화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지요.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어떻게 성묘를 했을까요?

추석 성묘는 가야 수로왕 때부터

해마다 고인이 죽은 날에 지내던 제사를 '기제사'라고 해요. 중국 당나라 때의 의례서에는 기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 벌초와 성묘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희가 일상생활의 예절에 대해 기록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는 3월 상순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 지낼 때 벌초를 한다고 적혀 있고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안병현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한식(4월 초)과 추석 같은 명절 때 주로 벌초와 성묘를 했습니다. 특히 추석에 성묘한 것은 삼국시대 가야의 수로왕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성격의 책 '오주연문장전사고' 풍속 편에 이같이 적혀 있거든요.

'신라 유리왕 19년(42)에 가락국의 수로왕이 즉위했다. 수로왕에서 10대 구형왕까지는 모두 합해 491년이 되는데,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 가락국에서는 시조 수로왕의 사당을 처음으로 수릉(首陵·수로왕의 묘) 옆에 건립하고 1월에는 3일과 7일, 5월에는 5일, 8월에는 15일에 제사를 지내왔다.'

머슴·거지도 명절이면 성묘

고려시대 이후 우리 조상은 계절에 따라 명절을 정하고 그에 맞는 여러 풍속을 발전시켜 왔어요. 우리 조상의 4대 명절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이 꼽히죠. 이때 성묘와 벌초를 했다고 해요. 특히 한식과 추석에는 꼭 성묘를 했다고 세시풍속에 관한 책이나 여러 역사적인 기록에 전해요.

조선시대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한식과 추석에 조상의 묘를 살피는데, 이때 머슴이나 거지라도 모두 돌아가신 부모의 무덤을 돌봤다고 합니다. 또 성묘를 떠나는 머슴에게 주인이 새 옷과 신발, 허리띠를 해줬다는 기록도 있어요.

조선 왕들의 성묘 나들이 '능행'

나랏일로 분주했던 임금도 성묘를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했죠. 효(孝)를 강조하던 유교 사회에서 왕이 직접 효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며 성묘를 간 거예요.

왕이 궁궐 밖으로 나들이하는 것을 '거둥'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왕이 선왕 또는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에 성묘를 하려고 궁 밖에 나가는 걸 특별히 '능행(陵幸)'이라고 불렀지요. 왕과 왕비가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 불렀거든요. 왕족의 무덤인 '원(園)'에 왕이 거둥하는 것은 원행(園幸)이라 했고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은 대부분 서울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 일대에 있었고, 왕이 능에 참배하러 갈 때는 1~3일 정도의 시일이 걸렸대요. 대부분의 왕은 1년에 2~5회 정도 능행을 했습니다.

왕이 능에 행차한 것은 효심을 나타내는 목적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행차하는 과정에서 백성과의 접촉을 통해 민심을 직접 듣고,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왕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어요.

[징 쳐서 억울함 호소한 백성들]

정조는 무려 63회에 걸쳐 능행을 거행했어요. 이 중 상당 부분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에 다녀온 것이었지요. 정조는 왕릉을 참배하는 능행을 통해 수도권 지역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살피면서 백성의 민원을 듣고 해결해 줬어요. 민원인이 민원 사항을 문서로 작성해 올리는 일을 '상언(上言)'이라고 하고, 징이나 꽹과리를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을 '격쟁(擊錚)'이라고 했어요. 재위 24년 동안 정조가 능행길에 해결해준 상언과 격쟁이 수천 건에 달한다고 해요. 능행길이 백성들과 직접 대화하는 소통의 길이었던 셈이에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