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두렵고 설레던 격동의 시대… 한국 근대 그린 다양한 시선

입력 : 2019.08.24 03:03

['근대의 꿈: 꽃나무는 심어놓고'展]

변화한 풍경과 시대상을 반영하고 유럽 화풍에 영향받은 그림도 보여
1950년대 대학생들 모습 담은 그림… 여자도 교육받게 된 시대상 보여줘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서울 풍경화, 전통 산수화와 달리 사실적인 묘사

한반도의 '근대'는 폭넓게 보면 188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입니다. 이전의 '전근대' 시기와 여러 면에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시기였지요.

근대에 들어와 생긴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시민이 진정한 의미의 개인으로 거듭났고, 왕도 양반도 아닌 평등한 시민이 사회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결과였지요.

또 가문과 혈통보다는 부부의 사랑을 중시하는 결혼제도가 퍼져 나갔고, 그 결과 가족도 과거와는 다른 성격을 갖게 됐습니다. 남자와 어른만을 떠받들던 삶에서 벗어나 여자와 아이도 점차 존중받게 됐어요. 집에서만 지내던 여자들도 신식 고등교육을 받아 사회활동의 길이 열렸고, 아이들은 미래를 이끌어 갈 희망의 새싹으로 여겨졌지요. 신분과 권위에 억눌려 스스로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던 개인들이 지식의 힘을 입어 각각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런 변화를 근대화라고 합니다.

서울 노원구에 있는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다음 달 15일까지 '근대의 꿈: 꽃나무는 심어놓고' 전시가 열리고 있어요. 이곳에 가면 근대가 가져온 다양한 변화를 여러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근대마저도 오래되어 빛바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바라보았던 당시의 눈으로 감상해 보세요. 때로는 두근두근 설레며, 때로는 익숙한 세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갔던 근대인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작품 1 - 박득순, ‘서울 풍경’, 1949, 캔버스에 유채.
작품 1 - 박득순, ‘서울 풍경’, 1949,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작품 1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9년 서울 모습입니다. 박득순(1910~1990) 작가는 지금의 서울시청인 '경성부' 도시계획과에서 일하며 서울 곳곳의 모습을 그리곤 했어요. 그는 어느 가을날 남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고 느낀 감동을 화폭에 담았어요. 지금은 물론 더 높고 더 빽빽이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 시기에도 제법 높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화가가 하나하나의 건물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6·25전쟁 이전의 서울 거리가 어땠는지 알려주는 소중한 작품이죠.
작품2 - 박상옥, ‘서울의 아침’, 1957, 캔버스에 유채.
작품2 - 박상옥, ‘서울의 아침’, 1957,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작품 2 역시 언덕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인데, 앞의 그림보다는 물감이 두껍고 형태 묘사는 흐릿해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박상옥(1915~1968) 작가가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그림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낀 도시의 아침 분위기를 전하고 있어요.

이 두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본 이상적인 산수를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상을 직접 두 눈으로 관찰하면서 그린 것이에요. 화가가 어디에 서 있었을지 찾기 어려운 전통 산수화들과 달리 이 두 그림은 화가가 어느 지점에서 거리를 내려다보았을지 바로 알 수 있지요.
작품3 - 장우성, ‘청년도’, 1956, 종이에 채색.
작품3 - 장우성, ‘청년도’, 1956, 종이에 채색.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작품 3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장우성(1912~2005) 화가가 서울대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1956년에 그렸어요. 간소한 옷차림을 한 대학생들이 뜰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에요.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대학생들을 주제로 삼은 것도 신선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 뒷모습을 화면 가운데 배치한 것이라든가 사람들 틈에 가려진 사람의 얼굴까지도 보이는 그대로 스냅 사진처럼 처리한 방식은 전통적인 초상화와 비교해볼 때 아주 신선했답니다. 각기 다른 자세로 다양한 곳을 쳐다보고 있는 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빨간 책을 들고 있는 여학생이에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받고 공부할 수 있게 된 시대적 변화를 드러냅니다.
작품4 - 이대원, ‘창변’, 1956, 캔버스에 유채.
작품4 - 이대원, ‘창변’, 1956,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뒷모습을 한 사람이 나오는 독특한 구성은 작품 4에서도 보입니다. 뒷모습을 한 인물의 시선이 창문을 향하고 있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도 그 시선을 따라 창문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어린이가 시선의 지배자입니다. 창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나라가 근대 시기 동안 외국의 낯선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이대원(1921~2005)은 유럽의 화풍에 관심이 많았어요.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Matisse)처럼 그도 빨강·노랑·초록의 대담한 원색을 사용하여 화려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게 그렸습니다.
작품5 - 천경자,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작품5 - 천경자,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작품 5는 천경자(1924~2015) 작가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천경자 역시 유럽의 그림들에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여자 혼자 여행을 떠나기 쉽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에도 화가는 아프리카와 남미 같은 머나먼 지구 저편으로 몇 달씩 세계 여행을 다녀오곤 했지요. 그러면서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그림은 여행을 다녀 온 후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거예요. 무표정한 얼굴과 섬뜩한 눈빛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지지요.

[자유와 함께 가난·불안도 커졌던 시절]

전시의 부제 '꽃나무는 심어놓고'는 한국 근대 단편소설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 이태준(1905~?)의 1933년 소설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이 소설은 고향에 심어놓은 벚나무가 꽃을 피우기 전 서울로 떠난 주인공이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기 위해 고생하며 '고향에는 꽃이 피었을까' 궁금해하는 내용입니다. 화가들이 그림으로 근대를 담아낼 때, 이태준은 글로 근대를 그려냈습니다.

근대화 시기 사람들은 진정 자유로운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 사회의 새 주인이 되기 위해 여러 모순 속에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교육을 받을 기회는 늘어났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취직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어요.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빈민들로 판자촌이 생겼고요. 초등학교에는 밥을 굶는 아이도 많았습니다. 박상옥의 '서울의 아침'에서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가난과 불안이 안개처럼 온 도시를 덮은 시절이었답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