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총이 자유 지켜준다고 믿어… 헌법서 '무장할 권리' 보장

입력 : 2019.08.14 03:09

미국의 '총기 보유'

'이곳 사람들은 옷 속에 총을 감추고 다녔다. 아주 사소한 싸움에서도 총을 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반(半)야만적인 사회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1년 미국 앨라배마를 여행하면서 남긴 글입니다.

그 뒤 두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미국은 한 해 4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도 미국 텍사스주와 오하이오주에서 대형 총기 참사가 벌어졌지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1917~1963)과 마틴 루서 킹(1929~1968) 목사가 총탄에 쓰러진 지 5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총기 규제가 요원한 이유가 뭘까요?

'원조'는 영국 권리장전

총기 보유 지지자들은 미국 수정헌법 2조를 내세웁니다.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국가)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는 조항으로 1791년에 제정됐지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공식 트위터에 공개한 최신호 표지입니다. 올해 미국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진 253개 도시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가운데 적힌 대문자 ‘이너프’(ENOUGH)는 ‘충분하다’는 뜻으로 더는 총격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공식 트위터에 공개한 최신호 표지입니다. 올해 미국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진 253개 도시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가운데 적힌 대문자 ‘이너프’(ENOUGH)는 ‘충분하다’는 뜻으로 더는 총격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트위터

왜 이런 조항이 헌법에 들어간 걸까요? 이건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영국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영국은 16세기 가톨릭 국가에서 신교 국가로 돌아섰지만 그 뒤로도 종교 갈등이 심했어요. 17세기 영국왕 제임스 2세는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겠다며 의회 승인 없이 상비군을 모집하고, 신교도를 탄압했지요.

결국 1688년 영국 의회는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왕좌에서 쫓아냅니다. 이듬해에는 절대군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권리장전'을 제정했고요. 여기엔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신교도는 자기 방어를 위해 무장할 수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죠. 권리장전은 바다 건너 거친 신대륙에 정착한 이주민에게도 적용됐어요.

무장할 권리

식민지 미국은 1775~1783년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어요. 전쟁 중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연방정부를 꾸린 데 이어 독립 후엔 독자적인 헌법을 비준했지요. 1789년의 일입니다.

미국 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자신들이 만든 연방정부가 과거 영국왕 제임스 2세가 그랬듯 상비군을 만들어 국민을 억압하면 어떻게 할지 우려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1791년 비준된 수정헌법 10개 조입니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제1조가 '종교 및 언론·표현의 자유', 제2조가 '무장할 권리'였어요. 당시 미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민병대의 힘으로 영국을 몰아냈다고 믿었거든요.

"민병대는 신화일 뿐"

다만 이런 믿음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보는 역사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독립전쟁을 이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민병대는 기습 교전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정규전에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인들은 '독재에 맞서는 힘은 총이고, 그 총으로 자유로운 나라 미합중국을 만들었으니, 총이 곧 자유'라고 믿었어요. 이게 오늘날 총기 소유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됐죠. 리처드 호프스테터(1916~1970)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를 '국가(왕)의 상비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자유민 민병대에 대한 신뢰'로 설명합니다.

수정헌법 2조에 나오는 '인민(people)'이 민병대를 뜻하는지, '모든 개인'을 말하는지도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는데, 1970년대부터 '모든 개인'으로 해석이 확대됐습니다. 2008년에는 전과자의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게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고요. 총기 규제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배경엔 이런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답니다.

[총기 규제 또 하나의 장벽 NRA]

미국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장벽 중 하나로 전미총기협회(NRA)가 꼽힙니다. “총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고 주장하는 이익단체지요. 전직 대통령, 법관 등 여론 주도층 500만명을 회원으로 두고 매년 로비와 홍보에 연 2억~3억달러를 지출하며 총기 관련 사업자의 권익을 도모합니다.

NRA의 막강한 로비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자 시(市) 경찰은 사고 예방을 위해 주민들의 총기를 압수합니다. NRA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어 ‘비상사태에서도 총기를 압수할 수 없다’는 주법·연방법이 제정되도록 합니다.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