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 관노비에 출산휴가… 아내는 130일, 남편은 30일
조선시대 출산휴가
정부는 출산휴가 기간을 늘리는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출산 장려책을 내놓은 임금이 있었답니다.
◇백성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
농업 중심 사회에서는 백성 숫자가 곧 국력이었어요. 사람이 많아야 농사도 짓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 ▲ /그림=안병현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조선 통치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 정책을 '조선경국전'이라는 책으로 엮어 왕에게 바쳤죠. 여기서 정도전은 백성, 즉 인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인 것이다. (중략) 과거 중국 주나라에서는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절하면서 받았으니, 이것은 그 하늘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조 임금은 실제로 정도전이 말한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전국의 인구수를 조사한 내용을 받을 때, 예를 갖춰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헌민수(獻民數·백성의 수를 바친다)'라고 합니다.
◇아이 낳은 여종에게 휴가 100일
조선왕조실록 1426년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여종)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고, 이를 규정으로 삼아라." 즉 전국 관청에 소속된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출산휴가를 주라는 말이죠. 또 1430년 기록을 보면, 임금이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다시 일을 하도록 했는데, 아이 낳을 날이 다가와 일을 하다 지쳐 집에 가던 길에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출산 한 달 전부터 일을 쉬도록 법을 만들라"고 합니다. 아이를 낳기 한 달 전부터 쉬도록 하라는 거지요.
이런 정책을 펼친 임금님이 누구냐고요?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여염집 규수는 산달에 맞춰 형편껏 쉬면 되었겠지만 노비들은 그게 여의치 않았겠죠. 세종대왕은 이들도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친 겁니다.
◇관비의 남편에게도 30일 출산휴가를
세종대왕은 4년 뒤 더 놀랄 만한 출산 정책을 발표합니다. "여종은 출산일 앞으로 한 달, 뒤로 100일을 쉬도록 하였으나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않아 산모를 도울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남자 종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하도록 하라."
즉 출산을 한 관비(관가에 속한 여종)의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줘서 산모를 돕도록 한 거예요. 오늘날의 배우자 출산휴가와 비슷한 제도죠. 우리나라는 오는 10월부터 배우자가 아이를 낳으면 10일간 유급 휴가를 가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조선시대가 되레 기간이 길었습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출산 장려책은 관가에 속한 여종, 즉 일부 하층민에게만 적용됐다는 한계가 있어요. 그렇지만 600년 전에 벌써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도움이 절실한 계층을 대상으로 과감한 출산 정책을 시행했다는 건 역시 놀랍죠.
['셋 이상 쌍둥이'엔 쌀·콩 하사]
요즘은 '다둥이'라고 해서 아이를 여럿 낳으면 나라에서 현금, 세제 혜택 등을 줍니다. 조선시대에는 자녀가 많다고 나라가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어요. 다만 ‘세 쌍둥이 이상’을 낳으면 도움을 줬습니다.
왕실의 재정 상태나 임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셋 이상의 쌍둥이를 낳으면 아들 딸 구분 없이 쌀과 콩 10석을 임금이 하사했습니다. 세종 때 종 9품 관리가 녹봉으로 1년에 받는 쌀과 콩이 10석이었다고 하니 거의 1년치 양식을 내려준 셈입니다. ‘인조실록’에는 세 쌍둥이 가족에게 필요한 물건을 줬다는 기록도 있어요.